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동1길 13에 가면 조선중기 문신이며 충절로 이름난 정온선생의 종택이 있다. 이 집은 선생의 생가로 그의 후손들이 1820년(순조 20)에 중수하여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셨으며 중요민속 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느 양반가와 다를 바 없이 솟을 대문으로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ㄱ字형의 사랑채가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一 字형의 안채가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두 줄로 된 겹집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모두 남향으로 지어졌으며 내루에 눈썹지붕이 따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북쪽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입구 솟을대문 위에는 그 당시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만 내린다는 인조임금의 정려문 “文簡公桐溪鄭蘊之門(문간공동계정온지문)”이 걸려있다. 이 고택은 2012년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하는 명품고택으로 선정되어 사랑채와 중문채 대문채는 고택 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안채는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정온선생(1569~1641)은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고 한강 정구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사서, 정언을 역임하였고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해 부당함을 상소하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유배 중에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후학을 가르치는 등 노력을 하였기에 제주에서는 정온을 제주오현 중 한 사람으로 추앙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등용되었고 이어 대사간, 경상도관찰사, 이조참판,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길로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덕유산 모리에서 은거생활 중 1641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훗날 정조임금은 선생의 충절을 기려 영의정과 홍문관 대재학에 추증하였다. 선생은 광주 현절사, 제주 귤림서원, 함양 남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금원산(1353m), 모리산(872.3)을 지나 성령산(448.4)을 일으키고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마을 뒤 현무봉(300m)을 만들었다. 고택은 현무봉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용진처에 정확히 자리 잡았다. 이곳의 수세는 집 뒤편 현무봉 양측에서 흘러나온 실개천이 마을 앞 강천에 합류하여 서출동류로 흐르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위천(渭川)에 합류하여 거창으로 흘러 나간다. 세 곳의 물이 마을 앞에서 합류하니 마을에 부를 가져다주기에 충분하고 정면에서 약간 우측으로 보이는 기백산(1331m)은 그 끝이 뾰족한 문필봉으로 문사가 태어날 것을 예견해주고 있어 이러한 곳은 부귀가 동시에 보장되는 장소다.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4-10-22 19:29:49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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