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109다시 무명의사들을 기린다.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면, 150명이 출전하였다가 40명이 전사, 15명이 출전하였다가 2명 전사, 48명이 출전하였다가 41명이 전사, 100명이 출전하였다가 60명이 전사, 20명이 출전하였다가 13명이 전사, 30명이 출전하였다가 2명이 전사했다. 전사자를 합해보면 158명이다. 이들 중 창의지나 유사에 기록으로 남은 사람은 과연 몇 명일까?이형표②李亨杓 義士 略歷(이형표 의사 약력)李亨杓(이형표)는 字(자)는 聖範(성범)이요 號(호)는 處憂堂(처우당)이며 관향은 永陽(영양)이요 始祖(시조)는 高麗神虎衛大將軍 永陽君 諱 大榮(고려신호위대장군 영양군 휘 대영)이고 이하의 역대세덕은 본집 家狀(가장)이 첨부되므로 생략한다. 부친의 諱(휘)는 時化(시화)요 모친은 坡平尹氏(파평윤씨) 諱(휘) 致格(치격)의 따님이라. 哲宗戊午二月二十六日(철종무오이월이십육일) 永川郡道川里第(영천군도천리제)에서 공을 출생하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후하고 행동이 남달라서 이웃동리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래에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 하였다. 公(공)의 나이 열세 살 되는 庚午年(경오년)에 부친의 상사를 당하는데 公(공)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서 부친의 명을 수일간 회복시키고 출천지효자란 칭찬을 받았다. 평생에 교제방법은 온순하고 겸손함을 주장하고 물질취급은 청렴하고 정직한 것을 행세하였기에 그 지방에 점잖은 인물이란 명망이 있었다. 학문은 편모시하로 된 관계로 장구한 세월을 허비하여 우수한 공부는 못하여도 자력근면으로서 통사와 소학 칠서 등을 학습하고 일찍이 제세안민에 뜻이 있어 육도삼략 등서를 숙독하였다. 甲申(갑신)정변 이후로 시국이 항상 복잡하게 되므로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구하고자하여 서로 동지를 찾아서 모이는 곳마다 시국 일을 의논하였다. 乙巳五(을사오)조약을 강제로 당하고 전국상하에 울분이 극도에 도달될 때에 경주인 李韓久(이한구)로부터 都察使 東广 鄭煥直先生(도찰사 동엄 정환직선생)이 光武帝(광무제)의 밀촉을 받아서 義兵(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코자하여 그의 아들 鏞基(용기)를 영남에 보내서 의열사를 모집하는 격서를 받고 크게 기뻐하여 즉일에 창의소를 방문하여 鄭鏞基(정용기)와 기타 要人(요인)들을 면담하고 본군 내 징모에 대하여 활약하기를 자원하였다. 그때 영천군내를 한하여 군인징발과 물품모집을 하기로 책임진 사람들은 公(공)과 李壽寅(이수인), 鄭致錫(정치석), 鄭鎭英(정진영), 李斗圭(이두규) 등이다. 公(공)은 그들을 더불고 활동을 시작하여 公(공)은 영천남부지역을 분담하여 丙午年(병오년)부터 징모된 군인을 주사산성 훈련소에 보내고 수집된 물품을 운문, 구룡 양산 인근에 장치하여 몇 해 동안 진후원조를 꾸준히 하였다. 영천, 경주, 청도 삼군경계에 큰 태령 고봉이 있는데 구룡산맥을 경유하여 운문산에 도달하는 통로이라 그 재 이름을 의병재라고 지금까지 그대로 부른다. 그때의 그 지방 실적이 왜정의 경북고등경찰요사에 기록된 것을 보면 양력으로 丁未十月十五日(정미시월십오일) 자인방면에서 의병 一百五十名(일백오십명)이 출전하였다가 四十名(사십명)이 전사하고 지휘자는 체포되었다 하니 이것은 산남의진이 음력으로 丁未九月(정미구월)에 각지로 출장하여 군수품을 모집한 그때에 해당되고, 戊申(무신) 양력으로 三月十四日(삼월십사일) 자인 동방 약 五十里(오십리) 지점에서 의병 十五名(십오명)이 출전하였다가 二名(이명)이 전사하였다 하였고, 戊申三月二十日(무신삼월이십일) 경주 서방 약 四十里(사십리) 지점에서 의병 四十八名(사십팔명)이 출전하였다가 四十一名(사십일명)이 전사하였다 하였고, 戊申四月一日(무신사월일일) 경주 서방 약 四十里(사십리) 지점에서 의병 一百名(일백명)이 출전하였다가 六十名(육십명)이 전사하였다 하였고, 戊申四月十一日(무신사월십일일) 경주 서남방 약 四十里(사십리) 지점에서 의병 二十名(이십명)이 출전하였다가 十三名(십삼명)이 전사하였다 하였고, 戊申六月十六日(무신유월십육일) 자인 동방 약 五十里(오십리) 지점에서 의병 三十名(삼십명)이 출전하였다가 二名(이명)이 전사하였다 하였으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