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에 가면 사명대사(1544~1610)의 생가가 있다. 그런데 사명대사가 출가하기 전에 살던 고향집은 그동안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가 지형 상 고라리 399번지를 중심으로 뒷산의 주맥이 흘러들어오고 있어 증조부 임효곤이 이 장소를 풍수적 명당 터라 생각하고 잡았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밀양시의 현장유물조사에 의하면 이 장소에서 기와파편, 생활용품 조각 등이 발견되고 건물의 유구로 보이는 담장의 흔적도 발견되었기에 이곳을 생가 터로 인정하고 정비작업을 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어 놓았다. 밀양시에서는 고라리 399번지의 부지를 매입하고 생가 터를 정비 복원하여 기념비를 건립한 후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 116호로 지정하였다. 사명대사는 풍천 임씨로 본명은 임응규이고 그의 조상들은 이러한 명당 터에 기거하면서 대를 이어 과거 급제자를 배출해냈다. 증조부 임효곤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구 수령을 역임했고, 조부 임종원도 문과에 급제하여 강계부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임수성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본인도 18살의 나이로 승과에 급제했다.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는 조선조 숭유억불정책으로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명종 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는데 그때 서산대사와 함께 급제하였으며 문정왕후가 죽자 또 다시 폐지되었다. 그는 승려로서는 보기 드물게 종 2품의 벼슬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고, 이러한 입지전적인 그가 태어나서 자란 집터의 풍수입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명대사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나 “번뇌를 하지 않고 쓴 글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깨달은 뒤 부모가 모두 죽자 1559년(명종 14) 직지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그 후 묘향산 보현사에 있던 서산대사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전란 중에 일본군과의 강화를 위해 적진에 들어가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을 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6년 후에도 선조임금의 국서를 지참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면담 후 포로로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이곳의 산세는 대구의 남서쪽에 있는 비슬산에서 이어진 지맥이 남동쪽으로 뻗어 내려 묘봉산(514m), 천왕산(619.3m)을 지나 열왕산(663.3m)을 일으키고 이곳에서 남서쪽, 남동쪽, 다시 남쪽으로 지현굴곡을 하면서 계속 뻗어 내려와 마을뒤편의 현무봉을 일으켰다. 생가는 마을 뒤 둥근 금형체의 현무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 지점에 정확히 자리 잡아 지기가 충만한 곳이고, 주변의 좌우 청룡백호도 생가 터를 잘 감싸주고 있어 완전한 장풍국(藏風局)을 이룬다. 그리고 주변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은 생가 앞쪽에 모여 저수지를 이루니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전저후고(前低後高)형의 양택적 길지다. 풍수에서는 음양택을 막론하고 혈장 앞에 저수지가 있으면 이를 선저수(渚水)라 하고 부를 가져다준다고 해석한다. 현재는 연못 주변에 사명대사기념관 및 수변광장을 조성하여 관광단지화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