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선배 몇 분께 전화를 넣었다. 퇴직(退職) 때가 됐나 싶은 선배는 아직 2년이 남았다고 했다. 내가 신입 때 선배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쯤이지 않을까 했더니, 잠시 셈을 해본 선배는 지금 내 나이보다 서너 살 더 어렸었다고 일러 주었다. 정작 현직에 계실 것이라 짐작한 분들에게서는 뜻밖의 퇴직 소식을 접했다. 다행히 퇴직 소식을 전한 선배들은 제2 인생에 안착했다. 좋아하는 야구팀이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3루 주자가 담대한 도루를 감행해 성공한 것처럼 유쾌한 소식이었다. 한 분은 7월에 퇴직하고 숨을 고른 후 새해 첫날부터 경제지 지사장으로 간다고 하고, 또 한 분은 오늘로 33년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3년 먼저 명퇴한 뒤 내년 2월부터 기관장으로 가는 수순을 밟는다고 한다. 걱정은 아직 퇴직까지 꼭 2년 남은 선배의 육성에서 어릿거렸다. 강추위가 물러가고 평년 기온을 되찾은 날, 겨울 햇살을 마주하며 공원을 몇 바퀴 돌았다. 겨울나무를 찬찬히 살피면 겨울나무에 대한 앙상함, 메마름, 을씨년스러움 같은 우리네 인상은 그야말로 선입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무는 봄나무, 겨울나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무인 채로 인간이 정해놓은 시간(1년 365일)을 그저 순환할 뿐임을 새삼 자각하게 된다. 나무는 숨이 붙어 있는 한 생의 주기를 끊임없이 돌고 돌 뿐이다. 나무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좀 다른 구석이 있다. 나는 2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올 1년 칩거(蟄居)에 들면서 선배님들의 근황이 깜깜무소식이 됐더랬다. 직장을 등에 업고 있을 때는 레이다가 그런대로 팽팽 돌아가 누가 어쨌다는 식의 근황을 무시로 알 수 있었다. 한국사회의 냉엄한 현실 중 하나는 퇴직을 하면 1달 내로 현직 때의 3/4의 인맥이 끊어지고, 1년 후면 손에 꼽을 사람 정도만 남았어도 다행이라는 점이다.한국은 좁은 땅덩어리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한 사회이고, 일은 일로써만 사람의 맥을 잇게 하고 인맥을 풍성하게 한다. 사람과 사람 간 관계는 일이 없으면 무용해지는 건 상식에 가깝다. 한 사람이 빠진 자리는 다른 사람이 메워 또 다른 일을 만들고 일을 굴린다. 더 경쟁적으로, 더 저돌적으로. 한편 돈 문제가 빠질 수 없다. 고정적인 수입이 있을 때와 퇴직 후 수입이 단절됐을 때의 삶은 천양지차가 된다. 누군가와 교류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밥값과 찻값을 전제해야 하는데, 고정수익 없이, 연금에 의존하는 삶은 점점 위축되고 쪼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개의 서민은 60(예순) 즈음이면 자녀 교육 등 갖가지 이유로 기본 1~2억 원의 빚을 떠안고 있기 마련이다.나는 동년배나 후배보다 선배가 많은 쪽인데, 그 선배들은 대개 내 아버지뻘이나 삼촌뻘이다. 20대 때부터 그들의 인생행로를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살았으니, 그 세월만도 어느덧 20년이다. 퇴직을 하면 크게 3가지 방향이 옳지 않나 싶은데, 이것도 선배님들의 인생경로를 통해 체득한 것들이다.첫째 앞의 두 선배님들처럼 제2 인생에 연착하는 것이다. ‘럭키가이’가 아닐 수 없다. 단 이런 분들에게는 연장된 직장인 인생에 두 배로 감사하며 살 용기가 필요하다. 짧으면 2~3년, 길어도 4~5년의 월급쟁이 삶이 연장될 뿐이기 때문이다. 본래 가진 자산이 없다면, 그 뒤가 막막하긴 퇴직 2년 남은 선배의 삶과도 다를 바가 없다.둘째 현직 때 인맥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아주 깔끔하게 정리하고 ‘혼자놀기’에 돌입하는 것이다. 이건 웬만한 내공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퇴직 전 10년 준비가 필수다. 평생 즐길 취미, 운동 준비가 이에 해당된다. 셋째 칩거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퇴직한 교수나, 법조인 부류의 삶이 대체로 이 경로를 밟지 않을까 싶은데, 외출을 삼가고 책읽기와 메모를 중심으로 난(蘭), 돌(石), 서예, 걷기 등을 소일거리로 노년을 즐기는 것이다. 책 속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 삶이 늘 담겨 있고, 그것으로써 연장된 사회생활도, 혼자놀기도 커버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00세 시대 진짜 998834일(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3~4일만 앓다가 죽자는 뜻)을 획책하는 일에 독서보다 첩경은 없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일이다. 책 읽는 뇌는 쉬이 늙지 않고 굼뜬 뇌세포까지 살려 쓴다고 하지 않는가. 실제 건강하게 백수를 누리는 노인들 중에는 교수 출신들이 많다.우리가 100세 시대에도 ‘골골 60년’을 사는 건, 어쩌면 건강하게 백수까지 살고 싶은 욕망에 비해 독서력이 거의 제로(0)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00세 시대 핵심은 의학기술이 아니라 끊임없는 뇌 단련일 수 있음을, 곰곰 생각해보자.숫제 대한민국 노인들의 삶은 거개가 술이나 화투로 허송세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세상이 환해졌어도 술과 화투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광버스 안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등산 가서 등산로 점령하고 앉아 술판에 화투를 치는 노인은 지구상에서 이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나는 그 진풍경을 볼 때마다 가슴이 짠하다. 이 나라 현대사가 아니라 이 나라 범부사(凡夫史)가 어지러이 뇌 속에서 요동치기 때문이다. 노년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 방법을 실천해 살 수 있는 노인이 이 나라에는 많이 없어 보인다.퇴직에서 칩거로 칩거에서 노인까지 이 나라 범부사처럼 갈지자로 너무 비틀거렸다. 그렇대도 인생은 인생, 그래도 [글밥]은 [글밥] 아닌가. 손님(독자)의 아량을 기대한다./심보통 202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