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250-2번지에 가면 조선 제 26대 고종의 비(妃)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다.이 집은 숙종 13년(1687)에 지은 고택으로 그의 6대조이신 민유중이 묘막으로 지은 건물이다. 민유중(1630~168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되니 곧 숙종의 장인이기도 하다. 명성황후는 그의 5대손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16살에 왕비가 되었고,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로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가다가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의 비(妃)로 간택되었고 아버지 민치록은 사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명성황후는 이 집에서 태어나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살다가 모친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 감고당(感古堂)에서 생활하던 중 왕비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감고당은 조선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폐위 되었다 복위될 때까지 5년 여간 생활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해 서울 안국동에 지은 건물이지만 1966년 쌍문동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도시개발(학교부지)로 인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2008년 이곳 생가 옆으로 이전해 왔다. 생가는 그 당시 건물로 안채만 남아 있었지만 1966년 안채를 수리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지어 원래모습으로 복원하고, 내부에는 소품까지 보관되고 있어 조선조 중부지방 사대부집안 살림집의 특징과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생가가 있는 여주는 여흥민씨의 시조 민창도가 정착한 후 고려 공민왕 때부터 이름 있는 관료들을 배출하면서 명문가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잠들어 있기도 한 이 고을의 여흥민씨 문중에서는 고려 원종의 비였던 순경태후를 시작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만 원경왕후(제3대 태종대왕비)와 함께 3명의 정비를 배출한 명성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이곳의 산세는 한남정맥에서 뻗어 나온 지맥이 이천 설성산(291m)에 이르고 설성산에서 다시 동쪽으로 행룡하여 여주 대포산(252m)에 이른다. 여기서 지맥이 둘로 갈라지는데 좌측가지는 북성산(258m)으로 세종대왕릉의 주산이 되고 우측지맥은 연화산(225m)을 지나 황학산을 일으키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명성황후의 생가 주산이 된다. 생가를 좌측에서 감싸는 청룡자락은 마을을 어느 정도 감싸주고 있으나 우측의 백호는 비주하는 모양세로 벌어져 있다. 안산은 금형봉의 아미산으로 마을에 좋은 기운을 보내준다. 이것은 마치 절세미인의 눈썹을 닮았기에 풍수가에선 “예쁜 딸 낳아 출세시키려거든 민비 생가엘 가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생가 뒤편에 있는 그의 6대조 민유중의 산소와 같이 생가에서도 이러한 예쁜 안산을 마주하고 있으니 후손 중에 왕비가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조산 넘어 연양천의 물은 멀리서나마 마을을 감싸주고 남한강에 합류하니 풍수에서는 이를 암공수(暗拱水)라하고 대단히 좋은 수세형국으로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