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필자는 주범이고, 호는 관천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문강공 사균의 12세손으로 1880년 고종 경진 8월3일에 경주(慶州) 북면 봉암리에서 태어났다. 천부의 성품이 빼어나고 특이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러운 것을 보고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비분강개함을 멈추지 못하였다. 1905년 을사에 이르러 간악한 도적들과 늑약을 맺음으로써 나라의 사직(社稷)이 위태롭고 백성들의 마음이 물 끓듯 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였다. 이에 규필은 분연히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뜻을 두고 멀리 영천으로 와서 정용기를 만나보고 눈물을 흘리며 “4천 년 문명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섬나라 오랑캐의 노예가 되었는데도 어찌하여 우리들은 이를 남의 일 보듯 한단 말입니까?”라고 하고 그날로 각 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어려움과 험난함을 피하지 않았으며, 산남의진이 진군하던 날 우포장과 우영장의 직책을 맡아 연달아 싸운 여러 날에 반드시 선두에 나서서 여러 고을에서 위세를 떨쳤다. 불행하게도 입암의 전투에서 모두 순절하자 규필은 그 후 또다시 이세기 등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싸웠지만 한갓 용기와 지략만을 허비할 뿐이기에 분하고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울분의 균(菌)이 가슴에 맺혀 병이 된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죽었다. 〈원문〉李圭弼은 字周範이요 號觀川이요 慶州人也라 文剛公思鈞之十二世孫也라 高宗庚辰八月初三日에 生于慶州北面鳳巖里하다 天性이 英異하야 見天下大亂하고 常與爲國同志로 慷慨不已러니 至乙巳하야 奸寇勒約하니 社稷이 將危하고 人心이 沸騰이라 憤然有干城之志하야 往見鄭公鏞基하고 涕泣曰四千年文明之國이 一旦爲島夷之奴隸어늘 吾等이 豈可岸視乎아 하고 卽日周到各處하야 求募死士에 不避艱險하고 在行軍之日하야 歷右炮右營之任而連戰多日에 必先登之하야 威振列邑이러니 不幸諸公이 皆殉節而又與李世紀等諸人으로 轉戰各地라가 徒費勇略하고 憤鬱之菌發리 結於胸膈하야 因病不起하고 歲餘而卒하다 <山南倡義誌 卷下44p>李圭弼 義士 略歷(이규필 의사 약력)李圭弼(이규필)은 字(자)는 周範(주범)이오 貫鄕(관향)은 慶州(경주)라 文剛公思釣(문강공사조)의 十二世孫(12세손)이라 庚辰生(경진생)이라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일어날 때 처음에 각지연락을 담당하였고 行陣(행진)할 때에 右炮將(우포장) 右營將(우영장) 요직을 역임하고 義陣顚末(의진전말)되고 光復運動(광복운동)에 협력하다가 逝去(서거)하다 <山南義陣遺史468p>이규필 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은 정용기 의병장은 포수와 농민 등의 민병을 규합하여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군사 소모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각 지역을 연락하며 의진편성에 힘썼고 창의 당시에는 연습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적의 모략에 속아 정용기 의병장이 붙잡히는 바람에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출옥한 정용기 의병장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07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사들을 모아 북동산(北東山)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하였다. 이규필은 이때에도 의진에 참여하여 우영장(右營將)에 선임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해산군인을 포섭하여 병력을 보강하고 군령을 정하여 장병들을 단속하는 등 군세를 확장하였다. 그해 8월부터는 청하읍을 습격하였으며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이규필은 산남의진의 우영장과 우포장(右砲將) 등을 역임하며 이와 같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의 장령들이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이후 이규필은 새로이 산남의진의 의병장이 된 이세기(李世紀)와 함께 대일항전을 계속하다가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화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