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모셔두고 큰절을 올려본 적 있는가. 나는 얼마 전 마흔다섯 인생길에서 그런 책을 만났다. 그 책을 발견한 건 최승범 에세이 <돌아보며 생각하며>에서였다. 이 책 136쪽엔 ‘한 학술원 회원의 삶’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그가 말한 이는 105세에 평생 학문의 길을 다한 최태영(崔泰永 1900~2005) 선생이다. 이 글에 최태영 선생이 100세 때 쓴 유저 <인간 단군을 찾아서>가 소개돼 있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법철학자이면서도 우리나라의 상고사, 특히 단군조선의 실체 규명에 평생을 바친 민족사학자”라고 소개돼 있다. “‘단군의 고조선 개국부터는 분명한 역사이지 신화가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라고 이어진다. 나는 책을 펼친 채 일어서선 이 글귀를 남다른 감흥으로 읽어내려갔다.이런 분의 죽음이 왜 사회적으로 회자가 안 됐을까. 그는 자식들에게 “나의 죽음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참학자(學者) 참지식인(知識人)이 아닐 수 없다 싶었다. 인터넷으로 최태영 선생의 저술을 살폈다. 최승범 선생이 소개한 <인간 단군을 찾아서>를 비롯해 <한국 상고사 입문>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등이 눈에 띄었다.1989년에 발행된 <한국 상고사 입문>의 경우 이 나라에 식민사관을 심어놓은 일제 어용사학자이자, 그런 삶을 아주 빳빳하게 살아 이 나라 역사학계 ‘거두(巨頭)’라는 별칭이 늘 따라붙는 이병도(李丙燾 1896~1989)의 양심고백을 이끌어낸 역작으로 소개돼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금세 유야무야 묻혀버렸다. 이병도를 사사한 후학들이 스승을 향해 일제 “노망이 들었다”고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후학들이 이미 역사학계 기득권이 돼버렸다.<한국 상고사 입문>은 도서관에서 ‘대출불가’ 도서로 분류돼 있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와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도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두 책을 훑으며 경외심(敬畏心)이 들었다. 두 책을 가지런히 두고 차 한잔 놓은 다음 나는 삼배(三拜)를 올렸다. 그리고 제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아내에게 프린트를 좀 부탁했다. 올해 연구과제를 마칠 때까지 한 달을 기다렸다. 아내가 어제 퇴근하며 프린트물을 가져다주었다. 제본기로 구멍을 뚫고 스프링을 걸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틈틈이 <인간 단군을 찾아서>를 읽었다. 그가 법철학에서 역사학으로 빠져든 경로는 ‘고대’라는 접점 때문이었다. 그는 한학, 일어, 영어 등에 두루 능통했다. 그는 11세 때 볕 잘 드는 무덤가에 앉아 하루에 1시간씩 구약, 신약을 정밀하게 통독한 뒤로 줄곧 어떤 책이든 정밀하게 읽게 됐다고 한다. 그는 <함무라비 법전> <바빌로니아 법전> 등을 잔글씨 영어로 읽었다고 한다. 고대 법전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우리 고대사로 빠져들었고, 단군의 존재가 신화가 아닌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밝혀냈다.그의 연구범위는 재재롭게 우리의 상고사 연구에서만 맴돌지 않았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일어에 능통했던 그는 일본 학자들의 한국 상고사 연구를 모조리 섭렵했다. 그렇게 <규원사화>는 인정하면서 <환단고기>는 위서라고 주장하는 학계 풍토를 성토했다. 또 구한말 미국인과 미국 선교사가 남긴 <은자의 나라 한국> <대한제국 멸망사>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같은 한국사 책을 비롯해 미국 학자들이 내놓은 논문을 정밀하게 살폈다. 거기서 우리네 정신사의 맥을 획득했다.그가 어떤 방식으로 ‘인간 단군’을 증명해냈는지를 살펴보면, 내가 얼마나 허튼 인생을 영위하며 살고 있는지 각성하게 된다. 또 내가 얼마나 허접스레한 인생을 쫓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는 이렇게 써놓았다.“내 서고는 아래층에 있다. 지난 1백년 동안 모은 책과 자료들이 방 4개를 차지하고 있다. 법률과 한국사의 중요한 고전은 하나씩 다 갖춰진 셈이고 자료별로 쌓아놓은 보따리들이 많다. 구한말 조선이 외국과 차례로 맺은 조약에 관한 모든 자료도 모아놓았다. <일본서기>의 모든 속편을 가진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번 회고록을 쓰면서도 모아놓은 책에서 많은 부분을 추려낼 수 있었다. (중략)(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