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마음이 타들어간다. 절기에 맞춰서 배추모종을 심었더니 숙지지 않는 고온의 태양열에 어린 모종들이 모두 타거나 말라죽어 다시 심는 사태가 이 집 저 농가에서 발생한다. 심어두고도 비가 내리지 않아 걱정이 태산이다. 그나마 물을 줄 수 있는 위치의 밭은 다행이라 하겠다. 모두들 입을 모아 걱정하는 소리, 이제 이런 이상기후가 계속될 터인데 농사는 앞으로 우쩌누…김진영자는 중옥이고, 호는 벽초, 본관은 의성이며, 빙암선생 몽추의 11세손이다. 1896년 병신 창의 때 청송의 중군장이었던 만송 대락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두루 나라 안을 돌아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산남 의거(義擧)의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의병진에 종사하여 장영서장관이 되었다. 입암의 전투에서 적의 탄환을 무릅쓰고 몸을 뽑아 힘껏 싸웠지만 아군의 참혹한 패배에 이르러 여러 의사들이 모두 순절하였는데 자기 혼자 요행히 살아남긴 하였지만 마침 늙으신 어머니의 병환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의 병환을 구완하였다. 그러던 중 또 다시 영덕에서의 패배가 있자 스스로 여러 의사들과 더불어 함께 죽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 후 또한 뒤에서 서종락 부대를 후원하다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관동, 경기도, 충청도 일대를 흘러 다니다가 나라 밖의 동지인 김좌진과 연결되었으나 결국 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공주의 감옥에 수감된 몇 년 뒤에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공주에서 죽었다〈원문〉金震榮은 字重玉이요 號碧樵요 義城人야라 氷巖先生夢鰍之十一世孫也요 丙寅倡義靑松中軍將號晩松大洛之子也라 以先世飮泣으로 踏國內하야 求募同志라가 聞山南之擧하고 身往從之하야 爲將營書掌官하다 立巖之戰에 蒙敵彈奮身力戰이라가 事至慘敗하야 諸公이 皆殉節하고 身獨僥倖而適有老母之病訃到陣故로 歸家하야 侍湯之中에 又有盈德之敗하니 自恨不與數公同死하고 又爲徐鍾洛通謀而援助陣後라가 事不如意하야 携家率하고 自關東으로 歷京畿湖西之間하야 潛通海外同志金佐鎭이라가 被執하야 繫公州獄而數年後에 出하야 未歸而卒於公州하다.<山南倡義誌 卷下45~46p> 金震榮 義士 略歷(김진영 의사 약력)金震榮(김진영)은 字(자)는 重玉(중옥)이요 貫鄕(관향)은 義城(의성)이라 入陣(입진)하여 將營書掌(장영서장)으로 있더니 후에 기호지방에 피신하여 해외 同志(동지)를 연락하여 광복운동을 하다가 逝去(서거)하다 <山南義陣遺史468p>김진영 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1896년 을미의병 당시 청송의진의 중군장을 역임한 부친 김대락(金大洛)의 기개를 이어받은 김진영은 국내 각처를 역방하며 동지를 규합하다가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경북 영천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을 결성한 바 있는 정용기 의병장은 1907년 4월 경북 북동산(北東山)에서 창의하여 산남의진을 재조직하였다. 이때 김진영도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장영서장(將營書掌)에 선임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습격하고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의 장령들이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김진영도 입암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진이 흩어짐에 따라 은신하였다. 이후 그는 재기를 모색하며 전국 각지를 순방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만주지역의 김좌진(金佐鎭) 등과 연계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