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붉은 새 해처럼 두 단어가 솟구쳐 올랐다. 치솟은 두 단어가 내내 머릿속에서 뱅글거렸다. 해마다 연말이면 교수신문은 그해를 단 넉 자 한자로 집약해서 발표하는데 그걸 눈여겨본 때문인가도 싶었다.지난해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見利忘義(견리망의)’. ‘사익을 쫓는데 급급한 나머지 의리를 잊어버린다’는 뜻이겠다. 교수신문은 출전(‘장자’)을 밝히고, 이를 ‘눈 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린 모습’이라고 풀어놓았다.묵은해는 그렇다 치고 새해는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그쪽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 그결에 문득 ‘깜냥’이 떠올랐고 연이어 ‘얼결’이 뒤따랐다. 지난해 나는 ‘도생(圖生)’이란 제목의 [글밥]을 날랐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이 엄중한 시기 각자가 잘 살아남기를 주문한 글이었다. 올해는 왜 ‘깜냥’과 ‘얼결’인가. 직감적으로 떠오른 두 단어는 처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성싶었다. 깜냥은 ‘깜냥대로’처럼 쓰여 ‘제 역량껏’ ‘제 분수껏’이란 의미고, 얼결은 ‘뜻밖의 일이나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겪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판’을 뜻한다. 깜냥이 어울리는 건 차라리 스스로 살기를 꾀한다는 도생 쪽이다.여러 날 깜냥과 얼결이 맴돌더니, 이 아침 독서 중에 돌연 ‘엎어 치나 메치나 정신 차리고 살든 정신 못 차리고 살든 깜냥대로 일 수밖에!’란 글월이 LED광고 문구처럼, 자막뉴스처럼 머릿속을 끔뻑대며 선하게 지나갔다.얼결에 사는 동시대인이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무진장 심각한 수준이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도 황당한 ‘얼결 사건’을 거푸 겪었다. 어제 퇴근 후 아내가 막둥이를 데리고 소아과를 갔다가 아기 점퍼를 잃어버리고 왔다. 아내는 병원과 약국에 전화를 걸어 찾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묘하게도 두 곳 다 없다는 회신을 주었다. 아내는 난감해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리고 자위(自慰)가 이어졌다. “거의 딱 맞아서 좀 지나면 못 입긴 해.” 그렇게 일단락하려 들었다. 나는 아내의 얼결을 확인하고는 차키를 들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운행 중에 아내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아내는 분명 약국에 뒀을 것 같다고 했다. 약국에도 없다고 하니 주차장에서 아이와 실랑이를 벌인 일을 기억해냈다. 병원과 약국에서 회신을 받고 보인 아내의 반응은 내 판단에 ‘인지부조화’라면, 아내의 기억 맞춤은 ‘확증편향’에 가까웠다.아무튼 현장은 답에 있었다. 처음부터 약국과 병원의 무성의 혹은 기만을 의심할 까닭은 없는 것이니 지하주차장부터 살폈다. 점퍼는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병원부터 갈까 하다가 아내의 첫 번째 지목지인 1층 약국부터 갔다.웬걸, 아내가 지목한 소파 위에 떡 하니 보란 듯이 점퍼는 놓여있었다. 아내의 애초 기억이 맞았던 것이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순간 짜증이 나기도 해서 처방전을 접수받는 안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결국 찾아보지도 않고 없다고 한 거밖에 더 되냐”고 따져 물었다. 안내원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고 약국이 바빠서 그랬을 것이라고 남 얘기하듯이 했다. 태도와 말투는 오만불손하기까지 했다. “외부에서 약국으로 전화를 걸면 누가 전화를 받게 돼 있냐”고 다시 물었다. “이쪽에서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 당신이 전화를 받았을 게 아니냐”고 했다. 자기는 “아니”란다. “앞전 근무자가 받은 것 같으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란다. 이 무슨 멍텅구리 같은 대화가 다 있는가. “좋아, 당신 앞에 근무자 이름이 뭐야. 내가 내일 다시 오겠다”하고 약국 문을 나섰다. 나서면서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옆에서 높은 소리가 오가는데도 젊은 약사 두 놈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거였다. 나는 그게 참 괴이하다 싶었다. 다시 되돌아 들어갔다. 안내원에게 말했다. “여기 대표약사가 누구요? 그 대표약사 좀 나와 보라고 하소.” 안내원이 약 제조실 커튼을 열려는데, 두 젊은 약사 중 한 명이 그제야 “제가 대표약사입니다”며 자기 쪽으로 와서 이야기하란다.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애 엄마가 앉았던 자리를 알려줬다는데 그걸 확인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부당한 일이냐”고 되물었다. 안내원 말처럼 “약국이 바빠서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아니, 집사람이 그때는 손님도 별로 없었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냐”고 되받았다. 어라, 이 약사 놈 점입가경이다. “데스크에서 일어나서 보면 유리막 때문에 안 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