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1327~1405)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1327년 경남 합천군 대병면 혹은 서산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나 둘 다 확실하지가 않다. 그의 속성은 박 씨이고 이름은 자초(自超), 법호는 무학(無學)인데 무학이라는 법호(法號)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네 가지 설화 중 <학의 보호>란 이야기에서, 무학대사의 어머니는 서산 간월도 사람으로 만삭 중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해산물을 팔러 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산통이 생겨 길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고, 아이를 그냥 풀 속에 놓아둔 체 시장으로 달려가 해물을 다 팔고 돌아와 보니 학이 아이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무학(舞鶴 혹은 無鶴)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는 1344년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면서 부도암(浮屠庵)에 머물렀다. 그런 후 진주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에 유학하여 먼저 중국에 와 있던 나옹(懶翁)과 인도 승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 후 1356년 귀국하여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왕사가 되어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풍수적 길지를 찾아 도읍지를 옮기는데 참여하였다. 태조는 무학을 전적으로 신임하였기에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그의 수탑(壽塔)을 세우게 하였다. 무학과 태조는 군신 관계를 떠나 격의 없는 사이였음이 아래의 야사에서도 나타난다.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시국이 안정되자 궁궐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가 무르익고 술이 취할 무렵 태조는 무학에게 “오늘 대사의 얼굴을 보니 꼭 돼지처럼 생겼소” 하니 무학은 “전하께서는 꼭 부처님을 닮으셨습니다”하였다. 이에 태조가 농담이라고 받아치자 무학 왈, “세상 만물이란 것이 부처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고 돼지 눈으로 보면 돼지로 보이는 것입니다”하니 태조 왈, 내가 졌소이다 하면서 파안대소하였다고 한다. 또한, 풍수에 능한 무학이 어느 날 임금과 함께 길을 가다가 산 밑에 집을 짓는 농부를 보고 “저 사람은 3년 안에 거부가 되어 고래 등 같은 집을 짓고 살 것입니다. 하니 임금 왈, 저곳은 몇 년 안에 폐허가 될 것이오” 하며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 그곳을 지나던 무학은 그 집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 왈, 대사님의 예견대로 큰 부자가 될 땅이 분명하지요. 그러나 큰 부자는 더 이상 이런 골짜기에 살지 않습니다. 하면서 대사께서는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는 크게 웃었다는 야사가 전해온다. 그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승려로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의 법맥을 이었으며 조선 초기의 중요한 불사를 주관하였다. 그는 마지막에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나이 78세, 법랍(法臘) 62세로 입적하였으며 대사의 부도는 나옹, 지공 선사와 함께 양주 회암사에 있다. 저서로는 ‘무학국사어록’, ‘인공음’, ‘불조종파지도’, ‘무학비결’ 등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