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연초부터 일진이 좋다. 지난 주말 폐점하는 중고서점에 가 책 50권을 골라낸 것, 이튿날 다시 가서 추가로 책 10권을 품은 것, 이웃 아파트 주민에게서 또 책 15권을 사들인 것 내게는 모두 로또 당첨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오늘 이른 아침 또 책 17권을 단돈 5,000원에 사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랬던가. 그 아파트는 쓰레기분리수거 날이었고 쓰레기 더미 귀퉁이에서 귀한 책 3권을 덤으로 주워왔다. 이 아침 모두 20권의 책을 서재 궁고재(窮考齋)로 들인 것이다.책 17권의 원주인은 지난주에 책 15권을 판 주인이기도 했다. 그가 판매 중인 다른 물건을 살펴봤다. 영재가 읽을 책부터 초등저학년이 읽을 책, 초등고학년이 읽을 책, 중학생이 읽을 책, 고등학생이 읽을 책을 분류해 판매하고 있었다. ‘아이 엄마가 대학을 보낸 뒤 정리하는 모양이구나’ 싶었다.이른 아침이지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판매하신 자녀 분 책들, 읽힌 노하우가 있을까요?”“아, 제가 읽은 본인입니다.”“이 책들을 다 읽으신 건가요?”“제가 읽은 것도 있고 우리 집 형제가 넷입니다. 오빠 둘에 동생까지요. 근데 큰 건 없구요. 저희 집 책장이 온갖 책들로 가득합니다. 어릴 땐 집에 티브이가 없었고 부모님께서 항상 거실에서 책을 읽고 계셨어요. 그럼 자연스럽게 따라 읽고 싶어지더라구요.”“실례지만 판매자는 지금 대학생입니까?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형제 분 모두 초중고 때 패드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나요?”“네. 저까지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다 투지(2G)폰 사용했습니다.”“동생은 패드를 사용하구요? 학습 동영상 시청용으로요?”“네네. 지금은 아무래도 시대가 바뀌었다 보니 스마트폰 사용은 불가피하더라고요. 요즘은 고등학생 때 스마트폰+인강으로 태블릿은 정말 필수인 것 같아요. 요즘은 인강 안 들으면 너무 뒤쳐져서요.”“그렇지요.”“대전 학원보다 인강 제대로 된 거 하나가 훨씬 유익해서.”“그런데 판매자 분은 대학 입학 전까지 2G폰만 써도 답답하지 않았어요?”“항상 학원만 다니고 바빠서 별로 답답하지 않았습니다.”“이첨저첨 고마웠어요. 늘 좋은 일, 하고자 하는 일 두루 이루길 바랄게요!”가만 이대로 끝내려니 상대가 대학생인 게 마음이 쓰였다. “책 읽는 걸 좋아하시면 제 책을 한 권 선물해도 될까요? 세상사는 이야기(에세이)인데 좀 두꺼운 책입니다.”“그럼 너무 감사하죠.”“서명해서 오전 중에 문고리에 걸어둘게요. 이름 알려주세요.”대학생 판매자가 내놓은 책 17권 위에는 한과 2개가 담긴 작은 지퍼백이 놓여있었다. 아침에 식탁 위에 올려둔 한과를 보고 아내가 “웬 한과?”라고 했다. 사연을 들려주니 “마음씨가 착한 분”이라며 “한과는 우리 라온이가 좋아한다”고 했다.아침에 라온이가 한과 하나를 먹자 바론이가 따라서 먹었다. 대학생 판매자와는 미래 우리 아이들 과외선생이 될지도 모른다는 농까지 한 터였다. “한과는 우리 노00 선생님 예비 제자 둘이 하나씩 나눠먹었어요.”“에고, 이따 몇 개 더 챙겨드릴게요. 맛있는 건데 잠결에 급해서 많이 못 챙겨드렸네요. 혹시 아드님 두 분 고등학생인가요?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응원선물 뭐라도 하나 챙겨드리고 싶은데.”“아이고, 괜찮아요. 집사람이 웬 한과라며 마음이 예쁜 분이라고 하네요. 우리 애들은 아직 어려요. 첫째는 올해 초등생이 되고 둘째는 만 4세가 되요.”“어머 정말요? 안 그래도 사이좋게 둘이 안 싸우게 뭘 드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딱 좋은 게 있네요! 아주 약간의 사용감은 있는데, 엄청 재미있어 할 거예요.”그러면서 아이들이 펜으로 그려가며 도안놀이를 할 수 있는 기구 2개를 사진으로 보여주었다.“아이고, 고맙습니다. 책과 함께 보이차 2종을 우려드릴 텐데 부모님과 맛보세요. 제가 곁에 두고 늘 즐기는 차입니다.”(계속)“혹시 몇 시쯤 오실 예정이신가요?”“10시 10분쯤 도착할 것 같네요.”20년 된 보이청차와 15년 된 보이숙차를 우려서 책과 함께 종이가방에 챙겨갔다.집앞 문고리에는 종이가방이 걸려있었다. 집에 와 열어보니 도안놀이 기구 2개 외에도 대한민국 지도 퍼즐, 한과와 차 몇 개 그리고 연필까지 담겨 있었다.연필이 담긴 지퍼백에는 깨알 같은 글씨의 서신이 들어있었다.‘연필을 사용하면 사각거리는 소리와 나무향이 좋아서 힐링이 되더라구요. 경험을 나누고파 동봉합니다. 책 읽은 후 한 줄 독후감을 써보는 경험은 어떨까요?’ 내 선물을 확인한 그녀는 이렇게 답신을 주었다. “헉! 작가님이셨군요. 이런 놀라운 일이! 소중하게 읽어보겠습니다. 상상도 못했네요.” “글쓰기가 좋아서 글을 쓰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책에도 보이차 이야기가 수 편 있습니다. 오늘 제가 선물한 보이차는 보이차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것 2종입니다.” “<보통 글밥> 한번 보시고 한 줄 감상주셔도 되요. 궁금한 것들 물어도 되고요.” 얼마 후 서문을 읽고 분홍펜으로 밑줄 그은 사진 넉 장과 함께 답장이 왔다. “다 읽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요. 운동가기 전에 조금 읽어봤는데 벌써부터 너무 마음에 들어요. 감정에, 그리고 글로 쓰이지 않은 부분까지 공감하면서 읽은 책은 처음인 것 같아요.” “대한민국에서 글 잘 쓴다는 대선배님들도, 언론계 선배님들도 무튼 인정한 책입니다. 도움이 되시리라 봅니다.” “향수, 와인, 책. 저는 이 세 가지가 가장 어렵지만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너무도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저도 작가님처럼 주변에, 제 손이 닿는 곳마다 행복을 나눠주는 멋진 인생을 살고 싶어요. +보이차 마셔봤는데, 혀에 떫은 게 느껴져야 할 것 같은데 느껴지지 않고 빠르지만 느리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는 이 새로움! 매우 중독성이 있네요. 이따 부모님 오시면 보이청차를 따뜻하게도 마셔봐야겠어요.” “좋죠!” 오늘 [글밥]은 마음씨가 예쁜 이웃 아파트 여대생과 대화창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작성한 것이다. 제목을 생기(生氣)로 달았는데, 문자 그대로 ‘싱싱한 기운’ ‘힘찬 기운’ 맑은 기운‘을 뜻한다. 생기는 본디 산뜻한 사람과 산뜻한 사람이 만나 주고받는 기운에 샘솟는 것이다. 나는 내 보이차 스승 양보석 선생님과 함께 할 때 가장 세고 좋은 생기를 받는다. 또 지난달 우리 라온이 바론이 학예발표회에 가서 아주 큰 생기를 얻고 왔다. 아이들의 싱싱한 몸놀림은 언제나 좋은 기운을 준다. 오늘 나는 이 여대생에게 말했다. ‘뒷날 우리 아이들 과외선생님이 될지도 모르잖아요’라고. 우리 라온이 바론이 과외선생님의 자격 1순위는 ‘밝고 맑은 마음씨를 가진 독서력이 만만찮은 대학생’이면 좋겠다. 집사람에게 이 여대생이 준 선물 사진을 카톡으로 보여주며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우리 라온이 예비 괴외선생 노00 님 선물.^^” [글밥] 손님 모두 새해에는 이 같은 생기 넘치는 경험을 자주 갖으시길!/심보통 202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