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117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지금은 임금을 위해 백성이 존재해야 하는 왕조시대가 아니다. 아니, 그 시절도 사실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음을 알아서 현명한 왕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 하물며 자유민주주의가 정점인 지금, 어설픈 분위기지만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 ‘정치인만 없으면 나라 걱정할 것 없다.’라는 뼈 때리는 말들이 지금 국민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음이다.金泰煥 義士 略歷(김태환 의사 약력)②이 변괴를 듣고 公(공)은 鬱鬱(울울)한 격분을 참지 못하여 제배들에게 격동시키기를 大丈夫(대장부) 이때에 나라를 돌보지 않고 父母妻子(부모처자)에 매이고 보면 구구히 살고저하는 이 생명이 도리어 부끄럽다 하더니 이때에 마침내 都察使(도찰사) 東广先生(동엄선생) 鄭煥直(정환직)이 光武帝(광무제)의 密詔(밀조)를 받고 그의 아들 鏞基(용기)를 嶺南(영남)에 보내서 義兵(의병)을 모집하여 慶尙道(경상도) 各邑(각읍)을 巡廻(순회)하면서 倭賊(왜적)들과 치열한 전쟁을 하는 그 무렵이라 公(공)은 그 義陣(의진)에 投身(투신)코자하여 그의 父母(부모) 앞에서 義兵(의병)에 가기를 간청하니 부모는 도리어 엄숙한 훈계를 하고 거절하는지라 公(공)은 기모양책을 강구하여 부모의 승낙을 얻고자하더니 그 동안에 立巖(입암) 接戰(접전)에서 山南義陣(산남의진) 大將(대장) 鄭鏞基(정용기)와 亞將(아장) 몇몇 要人(요인)들이 殉節(순절)하고 大將(대장)의 父親(부친)인 東广先生(동엄선생)이 다시 義陣(의진)을 統率(통솔)하게 되매 민간에서는 憂國痛哭(우국통곡)이 震動(진동)되고 陣中(진중)으로부터는 徵兵檄書(징병격서)가 연락부절이라 公(공)은 父母(부모) 앞에 울면서 애걸하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에 닥치는 이때에 이 나라에 백성된 의무로서 마땅히 힘을 다하여 싸울 것이며 들으니 山南義陣(산남의진) 大將(대장) 東广先生(동엄선생)은 七十老齡(칠십노령)으로서도 총칼을 피하지 않고 死地(사지)를 밟는 이때에 하물며 나이 젊은 나같은 장정으로서 어찌 가정관계로서 국가 위급을 저버릴 수 있습니까 小子(소자)는 죽더라도 이번만큼은 父母(부모) 命令(명령)을 순종 못하겠습니다 간청하니 兩親(양친)께서도 涕泣(체읍)하고 승낙하시되 우리가 너의 父母(부모)로 되어 너를 아끼는 慈情(자정)으로서 너의 큰 뜻을 방해할 수 없다 成敗(성패)는 국가의 운수요 死生(사생)은 너의 운명이라 하면서 승낙하시더라 兩庭(양정)에 하직을 올리고 山南義陣(산남의진)을 찾아가니 때는 丁未(정미) 九月下旬(구월하순)이요 公(공)의 年齡(연령)은 二十六歲(26세)였다 이때 陣中(진중)에서는 指揮將領(지휘장령)이 戰殉(전순)하고 東广先生(동엄선생)이 陣勢(진세)를 다시 收拾(수습)하여 新兵訓練(신병훈련)이 있기로 北東大山(북동대산)에 駐屯(주둔)할 그 시기라 先生(선생)은 의지가 맹렬한 公(공)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召募將(소모장)에 任命(임명)하고 新兵徵集(신병징집)을 指命(지명)하시는지라 公(공)은 杞溪(기계) 興海(흥해) 등지를 尋訪(심방)하여 新兵(신병) 百餘人(백여인)을 모집하여 入陣(입진)하니 先生(선생)은 또 父子之義(부자지의)를 許與(허여)하시더라 이와 같은 信任(신임)을 받고 各地方(각지방)에 활약하여 군인모집과 군수물자 수집에 만반노력을 다하여 先生(선생)을 받들고 慶尙道(경상도) 各州郡(각주군)에 出戰(출전)을 시작하니 그때에 本陣(본진) 常備兵(상비병)과 各地(각지) 派遣兵(파견병)을 合算(합산)하면 약 三千名(삼천명) 以上(이상)에 達(달)하며 전투방식은 각 지역별로 一枝軍(일지군) 씩을 파견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각 분대별로 상시 山野(산야)간에서 접전한 전투 수는 可(가)히 기록할 수 없으며 특히 邑城(읍성)을 습격하여 적의 수비병을 射殺(사살)하고 적의 巢窟(소굴)인 分派所(분파소)와 중요한 建物(건물) 등속을 압수한 고을만을 말하여도 淸河邑(청하읍)을 二次(이차) 興海邑(흥해읍)을 二次(이차) 그 다음은 新寧邑(신녕읍) 義興邑(의흥읍) 義城邑(의성읍) 盈德邑(영덕읍) 등 모든 고을에 대승리를 획득하였다 안타깝게도 그 이면에 상시로 계속되어오는 걱정은 진후보급이 미약하여 군수품이 자주 핍절되므로 적을 보고도 싸우지 못할 때도 있었다 盈德城(영덕성)을 공격하고 그 시는 적이 大大的(대대적)으로 山南義陣(산남의진)을 집중공격하고저 慶尙道(경상도) 東部(동부)로 몰려오는데 우리는 탄약 등속이 전부 핍절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