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12)수피아가 욕실 가운을 벗고 마중 나와 있었다. 약간은 예상은 했지만 막 욕실에서 벗어난 내게 선물처럼 그녀의 알몸이 반겨주었다. 놀라우면서 황홀했다. 엔틱한 소파와 엔틱한 테이블과 엔틱한 카펫에 이미 한 몸이 되어있었지만,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는 모뎀한 자체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신호로 바꿔주는 역할을 그녀는 톡톡하게 해주고 있었다. 분명 젊다는 나이만이 아니었다. 푸릇푸릇한 알몸이 주는 이미지도 그랬지만, 수피아에겐 독특한 매력이 발산되고 있었다. 질식하도록 저릿저릿한 느낌으로 내가 가진 최후의 한 꺼풀뿐인 욕실 가운을 스르르 내려놓았다. 엔틱한 남자가 모뎀한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 자신의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 시대에 지어져 오랜 세월을 부대끼며 명맥을 이어온, 그녀의 집은 늘 다른 궁리로 묘책을 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엔틱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의 열린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간, 새 생명에 대한 잉태를 꿈꾸었다. 가치와 기품이 빛을 발한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공간은 꿈틀거리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바꾸기 위한 혼자만의 노력은 한계가 있기에, 수피아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든지 몸속을 타고 임신할 준비가 된 여자이며, 최상의 나이라는 것을 새삼 주목하게 되었다. 번거로운 절차도 무시하고 싶었다. 남자라는 동물은 언제든지 종족번식을 위해 앞으로 튀어나온 무기로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기에,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돌팔매를 맞을 정도의 정말 부도덕하지 않다면 기꺼이 허락할 것이다.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금도를 넘어서지 않는 인격체라면, 그런 남자의 정자를 품어 주리라. 수피아가 발가벗은 나를, 발가벗은 몸으로 달아나지 않게 힘껏 껴안았다. 먼저 적극적인 공세를 하기는 주저거렸다. 정자의 착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섹스를 오랫동안 즐겨왔기에, 마치 면접관 앞에선 면접자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지금 느끼고 있었다. 제발 왕성한 정자가 활동하고 있기를.몸을 부비면서 밀착해오던 수피아가 못 참겠는지 소파에 상체를 반쯤 기대고 활짝 자신의 몸을 열어놓았다. 실내등이 너무 밝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발정기 짐승처럼 거친 호흡으로 달려들었다. 생살을 쥐어뜯어도 아프지 않을 흥분이 온몸을 감쌌다. 백미터 육상트랙 주자처럼 한 톨의 기운도 남기지 않고 쏟다가, 마라톤으로 서서히 전환되는 과정에서 러닝 페이스 조절까지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후에 연륜이며 경력이라 칭찬해주었다. 허지만 수피아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만족한 섹스가 아니라 정자와 난자의 만남과 착상일 것이다. 물론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내 나이도 감안해야한다. 성심성의껏 참으면서 가장 강력한 올챙이의 등을 떠밀어주어야 한다. 몸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최선은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배우 누구도, 우리나라 배우 누구도 그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몇 번 접했지만,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될 몫으로 다가왔을 때 부담감은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사정을 하고 있는 나를 오랫동안 품속에서 기다려주었다. 그녀의 이마와 코와 입술에 차례대로 입맞춤을 하면서 다시 충전하고 싶었다. 나이를 숨기고 싶은 투정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혹시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배란기를 잘못 계산한 수피아의 잘못도 몇 프로 만들고 싶었다. 그대로 늘어질 줄 알았는데 서서히 차오르는 내 몸의 열기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도 반짝반짝 거렸다. 신호를 기다리는 트랙주자처럼 엉덩이를 높이 들어 준비 자세를 취했다. 저토록 뜨겁게 저토록 아득하게 죄여오는 것이 그녀의 출발신호였다. 비틀대다가 쓰러져도 수피아의 품속이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보람찬 하루였다고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