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건지산 남쪽 산자락에 오르면 퇴계 이황(1502~1571)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율곡 이이가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라면 퇴계 이황은 동인들의 지주라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정한 주자(朱子) 이래 최고의 학자였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통 중인 화폐 천원 권의 앞면 모델이기도 하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6세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워 학문의 길에 들었고, 12세에 숙부에게 논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여 19세 때 주희의 성리대전을 독파하였다. 대학자인 만큼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의외로 과거시험에는 몇 번의 고배를 마셨다. 23세인 1523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24세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3번이나 낙방하였다. 27세인 1527년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 후 34세인 1534년 문과 초시 2등으로 급제했다. 이후 43세에 종3품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나 정치 난맥상에 많이 엮이면서 자의와 타의로 귀향과 귀경을 반복하게 된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주세붕에게 건의해 최초로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지었고, 60살에 고향에 도산서원을 지어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당대의 대유학자였던 서경덕과 논쟁을 벌여 ‘기를 이끄는 이’를 부각시켰으며 이러한 이황의 사상은 조선시대 주리론(主理論)의 뼈대가 되었다. 선조 때 대제학으로 일하면서 성학십도를 저술해 임금께 올렸고, 성리학이 국가이념이 되도록 만들었다. 저서로는 《도산십이곡》《성학십도》《퇴도선생자성록》등 수많은 문집이 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순공(文純公)의 시호를 받아 문묘에 들어갔으며 동국 18현의 한사람으로 남았다. 이황의 묘소는 다른 명사(名士)들에 비해 초라하다. 그는 임종 전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으면 조정에서 예장을 내릴 것인데 반드시 사양하라 하였고 덧붙여서 비석조차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후손들은 마지막까지 화려한 장례가 아닌 검소한 죽음을 택한 퇴계의 뜻을 받들어 묘소를 화려하게 단장하지 못했다고 한다.이곳의 산세는 봉화군 만리산(791.6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안동시 도산면의 건지산(557m)을 일으켜 본 혈장의 주산이 되었다. 여기서 계속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 끝 지점에 이황 선생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에 맏며느리 봉화 금씨의 묘가 있다. 주산에서 혈장까지는 지현(之玄) 굴곡(屈曲)과 더불어 두 번이나 과협을 하였기에 혈장에는 생기 가득한 장소다. 과협의 모양 또한 벌의 허리처럼 잘록해 아름다운 형상으로 후면에 혈이 맺혀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풍수고서 『雪心賦』에서는 과협이 있어야 그 뒤쪽에 혈이 맺힌다 하였고, 다른 모든 고서들도 혈을 맺음에 있어 과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혈장에 바람을 가두어 줄 청룡과 백호는 혈장을 향해 유정한 모습이지만 혈장 앞을 완전히 감싸주지 못해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피해가 예상된다. 다행히 청룡 자락은 좌측의 낙동강 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을 잘 막아주고 이 물은 혈장의 암공수(暗拱水)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