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15)단기 일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반짝 찾아온 가을도 떠나가고 있었다. 단풍도 진 산야는 음울하게 저물어갔고, 가을걷이도 진 들녘에는 기울어진 허수아비만 남아 서러운 노래를 읊조리는 듯, 하늘만 높았다. 차창 밖 풍경에 잠시 시선을 뺏기다가 문득 수피아가 떠올랐다. 한 달 전 쯤 안부전화를 받고 궁금했지만 간신히 참고 견뎠다. 일자리가 끝나기 며칠 전에 거울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이미 그녀는 마음속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나비처럼 끊임없이 요동치게 한 수피아가 일상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놀라웠다. 머릿속에서 떼어내고 싶을 정도로 귀찮게 하거나 성가시게 했던 한 때, 나는 늘 그 주변에서 맴돌았다. 한번이라도 우연처럼 들키려고, 그래서 관심받기 위한 몸부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무기력으로 번져왔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서 착상까지 꿈꾸며 맹렬하게 몸을 허락하던 수피아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니 잊었다하더라도 결과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어느 하늘아래 내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내가 모르는 아이가 자라고 있다면 어떻게 궁금해 하지 않을까. 그런 절실함에 몸부림치다가 살아온 여정에 깊숙이 들어가 보면, 얼마나 책임감 없이 정자를 난자 속으로 건네준 수많은 여자들이 떠올랐다. 오래 머물 수 없는 도시는 여기저기 많았고 나는 여기저기 욕정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모두 안녕들 하신가. 내 정액을 담아 보관해 두진 않았겠지. 스스로를 자신의 몸속에서 키우진 않았겠지. 허지만 수피아는 약간 예외였다. 드러내놓고 임신을 전제로 자신의 몸을 허락했고, 그에 따른 일련의 동작들이 하나같이 명령처럼 일사불란하게 사정을 했다. 암탉이 알을 품듯, 수피아는 오래도록 다리를 오므려 정액을 품어주었다. 단지 그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이전의 여자들은 한 방울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몸짓으로 욕실에서 ‘쪼그려 쏴’ 자세였다면, 그녀는 먹이를 천천히 삼키는 능구렁이 자세였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런 연유로 서로의 관계를 생각했고, 짜임새 있는 인연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하나의 도구로 여겨진 생각에 급기야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만난 여자들처럼 수피아에 대한 미련도 냉랭하게 찾아왔다. 그렇게 떨쳐내고 싶었지만 내 의도와 상관없이 우로지 입구에 정차한 핸들 커버의 감촉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주차장 앞에 있는 커피 자판기 앞으로 다가가 동전을 집어넣고 블랙버턴을 눌렀다. 종이 잔에 담기는 커피소리가 경쾌했다. ‘자판기 커피가 오랜만이네.’ 혼자 입안에서 굴리고 싶었던 말이 불쑥 밖으로 튀어 나갔다. 허공에서 완성된 문장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흩어지는 모양이, 의도치 않는 말이라는 정체가 드러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속엣말이 버릇없이 돌아다닌다면 그것 또한 세상은 난감해질 이유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런데 두 달 만에 돌아와 찾은 곳이 집이 아니라 우로지라니 우스꽝스러웠다. 그때도 그랬던 것처럼 수피아를 만날 기대감으로, 앞뒤 재지 않고 이곳으로 먼저 방향을 정한 것은 아닐까. 혹시나 만나게 되면 금붕어를 건네주고 싶었다. 거실 한 쪽에 놓여있던 빈 어항이 떠오른 것도 떠오른 것이지만, 수피아의 마음 속 빈 어항에 내면적인 ‘채움’의 역할을 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이런 세심함이 수피아에게 감동스런 요소로 작용하여 소원해진 관계가 복원된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시내에 있는 수족관에서 금붕어를 샀다. 흰 비닐봉지에 먼저 담긴 금붕어는 최종적으로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서 건네받았다. 눈으로 느끼는 청결함뿐만 아니라, 비닐 질에 대한 상급과 하급에 따른 안쪽과 바깥쪽의 차이일거라 짐작하면서 우로지로 다시 차를 몰았다. -계속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5-05-01 23:05:49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이 사람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