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가수내길 38-15)에 가면 조선 중기 문신 학봉 김성일(1538~1593)과 그의 정부인 안동권씨의 묘(雙墳)가 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68년 과거(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 權知副正字)에 임명된 후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1577년(선조 10)에는 사은사서장관(謝恩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을 세웠고,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일본에 다녀온 후 일행인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의 주장과는 달리 왜군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고 하였으나 2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유성룡의 변호로 다시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가 되어 의병들을 규합하였고 그 해 경상좌도관찰사와 우도관찰사에 차례대로 임명되었다. 1593년(선조 26) 경상우도관찰사로 재임 시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던 중 지병을 앓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676년(숙종 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64년(현종 5)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1679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성일은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면서 한 말까지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사후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을 비롯해 임천서원(臨川書院), 여강서원(廬江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영산서원(英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또한 그는 예학에 밝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학봉집』16권 10책이 전하며, 저술로『해사록』,『상례고증』,『조천일기』,『기묘일기』,『북정일록』,『조선연혁풍속고이』 등이 있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에서 남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여러 봉우리를 거쳐 안동시 와룡면 이하리에 240m의 봉우리를 일으켜 본 혈장의 주산이 되었다. 묘소는 이곳 주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의 용진처(龍盡處)에 위치하고 있다. 청룡·백호가 완전히 감싸주지는 못하나 풍수가에선 이곳의 혈장을 금계포란형국의 명당 터로 해석하기도 한다. 수세는 좌선룡에 우선수로 합법하며 묘소 우측 뒤편 와룡면 이화리 쪽에서 흘러나온 물은 혈장 앞을 둥글게 감싸주면서 흘러 마지막에는 낙동강에 합류한다. 학봉은 전란 중에 사망하였기에 시신을 바로 운구하지 못하고 지리산 산록에 가 매장 하였다가 같은 해 11월 장남이 마을 뒷산인 선영에 남향으로 옮겨왔다. 그는 한양의 유명 풍수 지관을 초빙하였으나 지관이 응하지 않다가 기일보다 늦게 도착하자 후손들과 약간의 언쟁이 있었고, 화가 난 지관은 광 중을 파던 중 땅속에 묻혀있는 탕건암(宕巾岩)을 파내어 버렸다. 이 돌은 생기를 갈무리하고 있던 중요한 돌이기 때문에 땅속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묘 옆에 있는 큰 돌이 그때 그 바위이며 당시 안동부사 한강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의 제문이 그 돌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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