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 烽燧289)방산(方山) 봉수 : 고을의 동쪽 30리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의 주사봉(朱砂熢)에 응하고 서쪽으로 성황당(城隍堂) 봉수에 알려주는데, 서로 간의 거리는 30리이다.(원문) 方山烽燧 在郡東三十里 東應慶州朱砂烽 西報城隍堂烽 相距三十里소산(蘇山) 봉수 : 고을의 동쪽 47리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의 형산봉(兄山熢)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성황당 봉수로 알려주는데, 서로 간의 거리는 40리이다.(원문) 蘇山烽燧 在郡東四十里 東應慶州兄山烽 西報城隍烽 相距四十里성황당(城隍堂) 봉수 : 고을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방산 봉수와 소산 봉수 등 두 개의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하양의 시산(匙山) 봉수로 알려주는데, 서로 간의 거리는 30리이다. 서쪽으로 성산(城山) 봉수에도 알려주는데 〔서로 간의 거리는〕10리이다.(원문) 城隍堂烽燧 在郡西十里 東應方山蘇山二烽 西報河陽匙山烽 相距三十里 西報城山烽十里  성산(城山) 봉수 : 고을의 서쪽 24리에 있고, 동쪽으로는 성황당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구도현(仇道峴) 봉수에 알려주는데, 서로 간의 거리는 15리이다.(원문) 城山烽燧 在郡西二十里 東應城隍堂烽 北報仇道峴烽 相應十五里구도현(仇道峴) 봉수 : 고을의 서쪽 40리에 있고, 동쪽으로는 성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신녕 여음현(餘音峴) 봉수에 알려주는데, 서로 간의 거리는 10리다.(원문) 仇道峴烽燧 在郡西四十里 東應城山烽 北報新寧餘音峴烽 相距十里(신녕) 여음현(餘音峴) 봉수 : 고을의 서쪽 50리에 있으며, 남쪽으로 구도현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의흥(義興)의 토을현(吐乙峴) 봉수로 알려주는데, 서로 간의 거리는 20리다.(원문) 新寧 餘音峴烽燧 在郡西五十里 南應仇道峴烽 西報義興吐乙峴烽 相距二十里공해 公290)영빈관(迎賓館) : 객사(客舍)291)이며 태조(太祖)의 전패(殿牌)292)를 봉안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수령은 매 달 초하루와 보름에 전패를 참배하여 배알하는데, 이는 모든 고을이 그러하다. 조선 헌종(憲宗) 을미년(1835년)에 중수하고 군수 홍기섭(洪耆燮)이 상량문을 지었으니,☞ 각주 289) 고려ㆍ조선 시대에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올려 변방 지역에서 발생하는 병란이나 사변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수단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로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우편(新式郵便)과 전기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전근대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방법이었다.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적으로 단축되었고,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하여 지방의 급변하는 민정상황이나 국경지방의 적의 동태를 상급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했다. 봉수제는 일반 국민들의 개인적인 의사표시나 서신을 전달할 수는 없는 것으로,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傳報機能)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 13세기)이다. 그러나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횃불과 연기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지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을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는 이미 주나라시대부터 시작하여 전한(前漢)시대에 봉수가 있었다고 하며, 그것은 점점 발달하여 당나라시대에는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수로왕의 치세중에 이미 봉화를 사용하였다고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10년 조(條)의 ‘봉현(烽峴)’을 비롯하여 봉산(烽山)·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수로왕이 유천간(留天干)을 시켜서 망산도(望山島) 앞바다에 나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단 배가 나타나면 봉화로써 통지하게 하라고 한 기록은 일반적 의미의 봉화임에 틀림이 없겠고, ≪삼국사기≫에 보이는 봉산성 등의 기록도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 이전에 이미 봉수제가 확실히 성립하였고, 당시 두 지역 사이의 문물교류로 미루어 군사적 의미의 봉수제는 실시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 고려 중엽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관계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의 봉수제 기원은 역제(驛制)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수 [烽燧]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90) 공공(公共)건물 291) 고려, 조선 시대에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기 위하여 각 고을에 설치한 숙소 292) 조선시대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에는 대개 삼존이 봉안되며 또 그 앞에는 거의 어김없이 수미단(須彌壇)이 설치된다. 이 수미단에는 종종 광배 모양의 나무에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壽千秋)’라고 글씨를 적은 명패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가운데 왕비와 세자의 경우 수제년(壽齊年)과 수천추(壽千秋)는 바뀌어져 사용된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전패는 글씨 내용에서 보듯 본래 왕실 최고 어른의 수명장구를 축원한 것이다. 축원문 글씨는 주칠(붉은 색) 바탕에 금니(金尼)로 쓰는데 이는 지고한 신분을 나타내는 한 격식이다. 축원문 주위에 용, 구름, 여의두문 등이 장식되었는데, 구름무늬와 여의두문은 용과 결합된 부속문양이다. 이들은 한 나무가 아닌 여러 나무를 얇게 깎아 상호 부착, 중첩시키면서 전체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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