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12번지에 가면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경재 하연(1376~1453) 선생의 묘가 있다. 그는 1389년 14살에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포은 정몽주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우면서 선비가 벼슬하는 것은 야망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던 중 4년 뒤인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당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두문동 72현으로 은거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런 후 자신도 조선 개국 초기에는 출사를 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새 왕조의 관직에 나갔다. 그는 1396년 21세의 나이로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였고 27세 때인 1402년(태종 2)에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이듬해 승정원 동부대언이 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는 비서실장 격인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후일 예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다.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 종파를 선·교 양 종 36 본산으로 통합하고 사원의 노비와 토지를 혁파하여 국가로 환수하는 등 불교의 폐단을 없애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1425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예조 참판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는 한 때 업무상 일로 모함을 받아 천안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고, 형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었으며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어 1445년(세종 27)에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1449년(세종 31)에 황희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1451년(문종 1년) 영의정에서 물러난 하연은 1453년에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시흥 소래산 자락의 묘소에 묻혔다. 이듬해인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과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 되었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저서로는 『경상도지리지』·『진양연고』·『사서오경대전』·『성리대전』·『경재집』등이 있다. 이곳의 산세는 한남정맥 시흥시 대야동 성주산(216.5m)에서 남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내려와 인천시 남동구의 소래산(299.4m)을 일으켜 주산이 되었다. 본 묘소는 주산에서 남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의 끝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사신사는 높이가 완전하지는 못하나 나름 장풍국을 이루고 좌우 용·호 자락에서 흘러나온 물 들은 신천에 합류하여 소래포구 앞바다로 흘러간다. 일부에서는 이곳의 묘역을 무인단좌형(武人端坐形)의 명당이라고도 한다. 묘소에서 보아 뒤쪽의 소래산이 투구를 쓴 장군의 모습이고 그 뒤쪽의 관모산은 장군을 보좌하는 문관이며 좌우로 겹겹이 감싸며 호종하고 있는 청룡과 백호를 장졸로 보아 무인단좌형이라는 것이다. 풍수 형국론이란 혈장 주변에 있는 산의 모양이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곳의 기운도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인단좌형의 경우 그 후손들에게는 훌륭한 무사가 배출되고,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의 경우 닭은 한 번에 여러 마리의 알을 품기 때문에 무리를 이끄는 호걸이 출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