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한다. 나의 존재는 나의 몸과 나의 생각, 견해로 이루어진다. 나 이외의 남은 나의 신체적 특징과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를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는 나를 평가해서 말한다. 그의 생각, 견해로 말이다. 몸과 말과 생각은 멈춤 없이 변화한다. 나름 일관성 있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생각도, 그의 생각도 변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어디에 주장할 만한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지금 세상 사람들은 나 이외의 것들에 대해 너무도 분명하게 평가하고 그것을 진리인양 주장한다. 단지 자신의 생각일 뿐인데 말이다.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다른 생각으로 채워지는 것, 그 나의 생각을 변하지 않을 진리로 포장하고 사상을 만들어 주장한다. 그리고 동조자를 동지(同志)로, 다른 생각을 주장하는 이를 적(敵)으로 규정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어우러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백남신자는 신근이고, 본관은 수원이다. 성품은 굳세고 곧으며 젊어서부터 활이나 총을 잘 쏘았다. 일찍이 지포 이공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거사의 날에 이르러 선봉으로 추대되어 무기를 거둔 공로를 인정받아 우포장이 되었다. 동엄공이 청송으로부터 바다를 인접한 지역으로 향할 때 남신이 가장 많은 사람의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동엄공이 “남신은 선봉의 재능이 있다.”라고 크게 칭찬하고 선도(先導)로 삼아 의병진을 이끌게 하였다. 적을 마주한 작전에서도 결코 항오(行伍)를 잃지 않았으며 여러 번 적을 포획하는 공이 있었지만 성정이 겸손하여 자신의 공로를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았다. 산남의진이 당하였던 앞뒤의 작전 실패로 남신 또한 적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갇힌 지 몇 해가 지난 뒤 출감하여 자연 속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끝내 늙었다.〈원문〉白南信은 字信根이요 水原人이라 性이 勁直하고 自少善射하다 嘗服師于芝圃李公하다 及擧事之日에 爲推鋒하야 收武器之功으로 爲右將하고 東公이 自靑松으로 向沿海時에 南信이 召募最多故로 讚之曰南信이 有先鋒之才라하고 爲先導向之하다 對敵作戰에 未嘗失伍하고 累有捕獲之功하고 兼退不伐이러라 前後軍敗에 爲敵之被執하야 繫獄數年而後出하야 以漁樵로 終老하다<山南倡義誌 卷下49~50p>白南信 義士 略歷(백남신 의사 약력) ①白南信(백남신)은 字(자)는 信根(신근)이요 관향은 水原(수원)이라 그의 始祖(시조)는 원래 中國(중국) 蘇州(소주) 사람으로서 新羅(신라)에 들어와서 光祿大夫(광록대부) 左僕射(좌복사) 沙工(사공) 大司徒(대사도)를 歷任(역임)하였고 그의 후예가 高麗時代(고려시대)에도 여러 代(대)로 上將軍(상장군) 要職(요직)을 歷任(역임)하였다 公(공)은 高宗(고종) 癸未(계미)에 慶尙道(경상도) 慶州府(경주부) 竹長縣里第(죽장현리제)에서 父(부) 泳洙(영수) 母(모) 月城崔氏(월성최씨)의 長男(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품이 勁直(경직)하고 기운이 健壯(건장)하고 위의가 엄숙하였다 나이 十六歲(16세)부터 총쏘기를 잘하여 포수로 유명하였다 행동은 항상 활발한 기상을 취하고 구구한 가정생계에 생각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芝圃公(지포공) 李韓久(이한구) 문하에 집지하였다 乙巳年(을사년) 겨울에 그의 스승을 따라서 남 먼저 山南義陣(산남의진) 기창소에 들어가서 某某(모모) 同志(동지)들을 더불고 각 지방의 연락을 책임지고 人員(인원) 모집과 物資(물자) 구모에 활약하여 많은 공로를 이루었고 丙午年(병오년)에 都炮將(도포장)으로 任命(임명)을 받고 陣頭(진두)에 활약하였으며 丁未年(정미년)에 部署(부서)를 재편성할 때에도 처음에는 都炮將(도포장)으로 있다가 조금되어 右翼將(우익장)으로 전임되어 여러 邑城(읍성)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進軍(진군)하다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