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읍성(古邑城) : 고을의 서쪽 2리에 있다. 이첨(李詹 1345~1405)303)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춘추(春秋)304)에는 성(城)에 관한 기록이 24군데가 있는데, 대략 모두가 〔축성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때가 올바르지 않음(非時)305)으로 인해 정의를 해치고 또한 규정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축성 사실 등을〕 기록하는 것은 〔이를 통해〕 백성들의 노고와 〔역사적으로〕 중대한 일을 〔후세에〕 보이고자 함이니, 비록 공자께서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보더라도 〔만약〕 성(城)을 쌓음이 법도를 넘지 않고, 노역을 붙이되 농사짓는 때를 어기지 않으며, 일이 올바름에 합치되게 한다면 반드시 장차 크게 〔축성 사실을〕 기록하여 찬미하실 것이므로 어찌 다만 〔기록쓰기를〕 그만둔단 말인가?임술년306) 봄 이지중(李止中)이 영주(永州)307)군수로 부임하여 와서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구들이 침입하였다. 이후로도 계속 〔왜구들의 침략이〕 이어져 〔이를 보고〕 씹어 삼키기를 무릇 스물여섯 번이나 하는 동안 영천의 백성들이 모두 강을 건너(渡江)308) 서쪽으로 와서는 입에 풀칠을 하며 지낼지언정 동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었다. 급기야는 이(李) 군수가 성을 쌓는다는 소문을 듣고는 〔백성들이〕 서로 솔선수범으로 찾아 와서는 〔모두들〕 부지런히 성을 쌓아 완성하였는데, 마침 적의 침입이 있다는 경보가 있어 이(李) 군수는 정밀하게 대비하여 수성(守城)의 도구를 갖추고 대중들에게 명하여 성으로 들게 하고는 병력을 순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굳건하여 적들도 우리들을 어찌하지 못하였다. 성을 쌓는 일은 늦가을에 시작하여 겨울 중간에 완성하였으니 진실로 그 〔올바른〕 때를 얻었다 하리라. 〔이같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도리로 이를 부린다면 백성들은 그 고달픔을 잊을 것이요, 재촉하지 않아도 빨리 일이 이루어지는 뜻은 진실로 그 속에 있으리라. 3리(三里)의 성(城)309)은 불과 백치(百雉)310)에 지나지 않지만 또한 법도가 아님은 아니다. 세 가지(三者)311)가 이미 갖추어 졌으니 당시에 태사씨(太史氏)312)는 영주(영천)에서 성에 관한 기록을 할 줄 몰랐던 것인가? 무릇 성을 기록함이란 축성(築城)의 기록이요 창시(創始)이다. 이 성(城)은 우연히 이(李) 군수가 땅을 다스리고자 세운 일시적인 뜻과 계획에서 나왔으나, 비로소 얻은 옛 기물(器物)들은 반드시 그 옛터에서 나왔을 것이니, 단연코 성에 관한 기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은 고을의 서쪽 청통역(淸通驛)313) 위에 있는데, 삼면이 높고 가팔라서 남쪽으로만 가히 오를 수 있다. 이(李) 군수는 나와 나이가 같은 벗으로, 그가 큰일을 일으킴이 가상하고 평소에 허물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가 기문을 청함에 감히 나의 글재주 없음을 이유로 사양하지 못했다.〔이첨이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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