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20)지하실 통로는 이미 깡마른 여자에게, 마술 상자만큼 다가와 있었다. 현관문으로 나서서 바라본 세상의 발걸음은 왠지 어색했다. 너무 밝아 눈이 부셨고 하나
같이 자신에 찬 경쾌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혹시나 어깨라도 부딪히게 되면 자신은 저만치 튕겨져 나갈 정도의 탄력과, 맹렬한 난폭성이 느껴져 스스로 위축되었다. 그렇다고 한 번도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수없는 상상 속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깡마른 여자는 항시 피해자로 몸을 움츠려만 했다. 그나마 뜸한 외출을 꼽자면, 일몰이 지나는 시간을 택한 것이 전부였다. 바깥세상을 통한 시작점만 달랐을 뿐 어차피 어우렁더우렁한 드나듦은 거기에서 거기인데, 깡마른 여자는 지하실 통로여만 세상 안과 편한 어깨동무를 고집했다. 현관문이 아닌 지하실 통로로 빠져나간 자신의 당당함이 비로소 맞설 준비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통로에 백열전구를 달았다. 내부에 필라멘트를 가열해서 불을 밝히는 그 과정이 너무 신선하게 다가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다지 기술적인 요소가 작용하지 않아도, 몇 개의 전구소켓이 달린 전선줄만 연결된다면 넉넉하게 통로를 밝힐 수 있었다. 예기치 않는 백열전구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전구 알을 소켓에 맞춰 돌려주면서 꽉 채워진 느낌이 전달되면 스위치를 돌려 성공과 실패를 확인하게 되었다. 워낙 성능이 좋아서 웬만하면 불이 켜지게 마련이었다. 필라멘트에서 전기를 맞이할 때, 미세한 떨림을 동반한 불 밝힘은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을 걷어내 주고 있었다. 깡마른 여자는 지하실 통로에 열 개의 백열전구를 달았다. 백열전구 한 개를 지날 때마다 스위치를 돌려 불을 밝혔다. 그리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표시라고, 읽었다. 바깥세상을 다녀올 때는 역으로 스위치를 돌려 불을 가두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잠시 목소리를 낮추는 거라, 읽었다. 오래전 누군가 다녀간 흔적으로 남은 돌탑도 환하게 보였다. 바닥에 깔린 모래알갱이들도 백열전구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정체를 드러내었다. 통로의 어느 지점에서 알게 모르게 끌어당기던 자기장은, 화강암이 범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백열전구는 가감 없이 맨살을 보여주었다. 놀랍고 신비로운 탐험가의 자세로 한발 한발 옮겨가며 불을 밝혀주었다. 여전히 날갯짓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가득한 지점에선 잠시 주춤거렸다. 더 이상 지하실 통로는, 몸을 의탁할 비둘기의 보금자리가 아니라고 스위치를 돌려 외눈박이 거인처럼 백열전구를 일으켜 세웠다. 때 맞춰 수백의 날갯짓은 다투어 출입구를 향했다. 생각보다 거센 저항을 받은 깡마른 여자는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 했다. 간신히 중심을 찾아 벽에 기대였을 때, 역한 냄새를 풍기는 비둘기 배설물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눈과 코로 달려드는 냄새를 떨쳐내기 위해 두 팔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면 악취가 달아날 것 같았다. 아무튼 더욱 깡마른 여자는 백열전구의 위력을 신뢰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전등도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덕분은 필라멘트 힘이라고 곱씹었다. 그러면서 용기와 자신감으로 담대하게 세상과 맞설 수 있는 근원이 필라멘트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자신에게 숨겨진 필라멘트는 어느 곳에서 항시 전력을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한 채로 나무문짝까지 다가가 녹슨 문고리를 잡았다. 매일 삭혀지고, 가라앉고, 헐거워지고, 우글쭈글해지는 나무문짝이 쉽게 파악 되었지만 지하실로 빠져나오는 출입구는 마땅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 일그러짐에 따른, 컹컹 거리거나 삐꺽거리는 비명들이 가슴 한편에 채집된 채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야 해가 떠오르는 자호천으로 향할 명분이 새하얗게 만발할 것 같았다. 깡마른 여자는 자호천 바닥에서 따글따글 모난 돌들이 부딪히며 순하게 자리 잡는 소리를 흘려듣지 않았다. 그랬다. 자호천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