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영천 임고 선원에 시집와 27살에 사망한 풍천 임씨(1735~1761) - 영천 임고면 선원리 환고정사(環皐精舍) 교와 정하준(1738~1819)의 부인 - 영일 정씨 집안의 전염병에 대한 대처 방법 - 영천 문화원 조양각 옆 영천읍성전시관에서 전시 - ‘영일정씨’ 역사문화전시회 ‘애감록’ 전시▲사진1 설명 : ①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 위치한 환고정사의 전경이다. 이 정사는 조선시대 숙종 때 학자인 정일진·정하준 부자의 추모정으로 1905년에 건립했다. ② 교와 정하준의 부친이 학고 정일진 ③ 정하준의 호가 교와이다.『애감록』은 영천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교와 정하준의 부인 풍천 임씨와 남양 홍씨의 장례에 관한 기록이다. 조문객의 성명, 조문객의 거주지, 문상한 날, 부의품 내역을 기술하였으며 제문이 수록되어있다. 돌아가신 분의 장례의 과정에서 받은 제문이나 조문객의 성명과 관계, 부조내용을 적은 기록을 묶어서 책 형태로 만든 기록물이다. 보통은 조선시대 남성중심의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이 기록은 오천 정씨 집안으로 시집온 두 분의 여성에 대한 기록이어서 주목할 수 있다.지난해 12월 18일 수요일에 849호에 실은 영천문화유산 재발견 이어, 교와 정하준의 첫 번째 부인인 풍천 임씨(豐川 任氏 1735~1761)의 애감록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고자 한다. 풍천임씨는 부군인 정하준보다 3살이 더 많았다. 27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 했으나 꽃다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한명도 두지 못했다. 사망의 원인 또한 전염병인 려(癘)라고 제문에 기록되어 있다. 여(癘)는 좋지 않은 병이라는 뜻으로 사용돼 왔다. ‘여(癘)’는 염병, 전염병을 의미한다. ‘여제’는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인 여귀(癘鬼)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임씨는 젊은 나이에 아들도 두지 못했고 전염병 얻었다. 부군인 교와 정하준 역시 전염병(설사병)으로 매곡으로 피해있는 상황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장례 절차를 시행한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풍천임씨의 상례절차를 표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오천정씨 문중의 여성인 풍천임씨의 상례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역병과 기근이 심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유교적인 전통 상례를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상중 제례를 빠짐없이 지내려는 흔적으로 보아 당시의 부인의 상례에도 지켜온 오천 정씨 집안의 예법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오천 정씨 문중에서 선원리에 거주한 함계 정석달(涵溪 鄭碩達 1660~1720)을 필두로 가례서인『가례혹문(家禮或問)』10권 5책으로 편찬하였고, 동시에 화북 횡계서당을 이끌어온 훈수 정만양(塤叟 鄭萬陽, 1664~1730)과 아우 지수 정규양(鄭葵陽,1667~1732)은 가례서인『의례통고』5권 7책과 오천 정씨 집안의 전통 개·장례의 설행을 담은『개장비요』를 통해 상당한 높은 상례의 준칙을 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2. 18세기 오전정씨 가례서 설명 ① 함계 정석달 편찬 『가례혹문(家禮或問)』 10권 5책 ② 훈수 정만양과 아우·지수 정규양 편찬 『의례통고』 5권 7책 ③정만양, 정규양 형제 편찬 「개장비요(改葬備要)」 單冊 ④ 정중기 편찬 「가례집요」 3책한편 풍천 임씨가 시집와서 살고 있던 선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임고면 매곡리에 거주한 매산 정중기(鄭重器, 1685~1757년) 역시도 가례서인『가례집요(家禮輯要)』를 편찬하였다. 18세기 오천 정씨가 집안에서는 가례를 집단적으로 연구하고 시행하였으며 많은 가례 주석서를 남겼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하지만 당시의 전염병이 발생한 긴급했던 상황에서 장례를 치루는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제문에 수록되어 있다.“……閱月調治 月前尋棲 餘勢未已 留喪淺土 又難經冬 力疾經紀 占宅密邇 已啓......” “……. 한 달을 넘겨 조리하다가 살던 곳에서 살펴보니 (전염병의) 세력이 그치지 않았다. 상을 치르지 못하고 임시로 매장하였는데 겨울을 넘기기 어려우니, 병을 무릅쓰고 계획을 세워 무덤 자리를 잡고 관을 넣을 구덩이를 팠다......”위의 표의 기록과 제문에서 보듯이 풍천 임씨는 사망 후 임시로 매장한 후, 7개월 지난 후에나 매장(하관)식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사망에서 매장까지 평균 약 10일 전후로 걸린 것에 비해 풍천임씨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상을 치르지 못하고 매장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당시 전염병이 심하게 돌아 어쩔 수 없이 장례를 치루 수 없을 만큼 전염변이 만연했던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코로나19를 겪었을 당시의 상황과 같은 혼돈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애감록’ 이야기는 다음에도 이어집니다.>경상북도박물관미술관협의회 사무국장 남애경 영천역사박물관 운영관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