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는 공훈전자사료관에서 매월 이달의 독립운동(2024년까지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을 선정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2025년 1월의 독립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이 등재되었다. 그 가운데 산남의진 의사와 관련된 내용이다. “ ~ 또 의병이나 화적까지 국채보상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호의를 보였다. 1896년 김산의진과 1906년 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의병장 벽도 양제안은 민중들이 모인 가운데 연설회를 개최하였고, 청도 출신 의병장 최한룡은 격문을 발표한 뒤 창의하였다. 심지어 영천·경주 등지에서는 화적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양민들에 대한 침해를 중단하고 자신들도 참여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례들은 신문 보도를 통해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경우이다. (중략) 후기의병 때 산남의진에 참여한 후에 영일군 죽장면 두마리의 보현산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벽도 양제안은 개별적으로 모금한 의연금 수백 원을 보관하고 있다가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된 뒤 모두 되돌려 주었으며, 이 과정에서 의연금을 군자금으로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산남창의지에도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가 조직되고 정용기가 회장으로 추대되어 취임하였으며, 단연회 통문을 발표하고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는 기록이 있다.具漢書 義士 略歷(구한서 의사 약력) ①具漢書(구한서)는 一名(일명)은 喜書(희서)이오 字(자)는 敬萬(경만)이며 號(호)는 友山(우산)이라 貫鄕(관향)은 綾城(능성)이오 文懿公八谷先生(문의공 팔곡선생)의 十二世孫(십이세손)이라 中代(중대)에 思悼世子(사도세자)의 亂(난)으로 피신하여 慶尙道(경상도)에 轉入(전입)하여 慶州府(경주부) 佳士里(가사리)에 數世(수세) 居住(거주)하였으니 公(공)은 그곳이 出身故鄕(출신고향)이다 性稟(성품)이 剛直(강직)하고 臂力(비력)이 出衆(출중)하여 壯士(장사)란 別稱(별칭)이 있었으며 젊을 때부터 총쏘기를 잘하여 善射手(선사수)란 著名(저명)도 있었다 본래 간담이 남보다 크고 公衆(공중)을 위하는 일은 잘하였다 國運(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甲申政變(갑신정변)으로부터 倭賊(왜적)들로부터 당하는 侮辱(모욕)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乙未(을미) 八月(팔월)에 우리 國母(국모) 민후(閔后)가 倭賊(왜적) 삼포오루(三浦梧樓) 一黨(일당)에게 被殺(피살)되었다 公(공)은 이때에 저 不共戴天之讎(불공대천지수)를 설치코자하여 寧海(영해) 등지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나라에서 中止(중지)하란 命令(명령)이 있기로 義兵(의병)은 解散(해산)시켰으나 心中(심중)에 맺어진 울분은 풀지 못하였다 公(공)은 생각하기로 머지않아 우리가 왜놈들과 큰 ㅊㅇ돌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當時(당시) 憂國之士(우국지사)로 이름이 높은 永川(영천) 鄭鏞基公(정용기공)을 심방하여 此後(차후)에 國家(국가)를 위하여 奮發(분발)할 일이 있게 되면 合心協力(합심협력)할 것을 약정하다 光武(광무)九年(구년) 乙巳(을사)에 왜적들이 우리나라 역적놈들과 더불어 所謂(소위) 五條約(오조약)이란 勒約(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니 우리는 國權(국권)을 송두리째 盜奪(도탈)당한 것이다 全國(전국) 人心(인심)이 울분할 때에 秘書丞(비서승)으로 있던 東广先生(동엄선생) 鄭煥直(정환직)이 光武皇帝(광무황제)의 密詔(밀조)를 받들고 그의 아들 鏞基(용기)를 嶺南(영남)으로 내려보내서 義兵(의병)을 모집하여 서울에 올라오라고 명령하였다 鏞基(용기)는 鄕里(향리)에 돌아와서 義兵(의병)을 모집할 준비로 특별히 사람을 보냈더라 公(공)은 이 연락을 받고 永川倡義所(영천창의소)를 방문하여 자기가 활동할 일을 자청 부담하고 돌아오다 永川倡義所(영천창의소)에서 特定(특정)한 條目(조목)이 있으니 누구를 막론하고 총을 쏠 줄 알든지 또는 총을 가지고 있는 砲手(포수)들은 그 사람의 사정여하를 불문하고 강제징발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國家有事之日(국가유사지일)에 특별한 기술자로 되었으니 이 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지위에 있는 대우를 보이는 것이다 公(공)은 옛날에 약속이 있는 그 동지들을 불러서 北東大山(북동대산) 주위에 파견시켜서 砲手(포수)는 누구를 막론하고 總動員(총동원)이 되도록 하여 두고 時期(시기)를 기다렸다 丙午(병오) 春三月(춘삼월)에 永川倡義所(영천창의소)는 山南義陣(산남의진)이라 名稱(명칭)하고 出征(출정)을 시작하다 公(공)은 同志(동지) 數百人(수백인)을 인솔하고 入陣(입진)하여 卽日(즉일)에 大將(대장) 鄭鏞基(정용기)로부터 都總將(도총장)이란 임명을 받고 前線(전선)에서 활약하다 列邑(열읍)을 순회하여 서울 길을 취하다가 운수 관계로 大將(대장)이 大邱(대구)에 체수되고 그 시기를 조종하여 一時休兵(일시휴병)을 약속하고 大衆(대중)을 解散(해산)하다 丁未(정미)夏四月(하사월)에 山南義陣(산남의진)은 옛날 同志(동지)를 다시 부른다 公(공)은 자기가 指向(지향)시키고 있던 그 사람들을 다시 인솔하고 入陣(입진)하여 그날에 또 都總將(도총장)이란 任命(임명)을 받고 前線(전선)에서 활약하여 淸河(청하) 薪城(신성) 紫陽(자양) 등지의 격전을 겪고 北上(북상)할 준비로 全軍(전군)이 各地(각지)로 파견되고 本部(본부)가 將營守衛兵(장영수위병) 百餘人(백여인)을 인솔하고 竹長(죽장) 等地(등지)에 주둔하였다가 왜적과 접전되어 大將壇(대장단)이 무너졌다 (계속)<山南義陣遺史354~3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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