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 <보석다관>에서 박성우(영남일보 경산담당) 선배를 만난 이튿날, 나는 저 아래 경산 하양 고향 땅을 지르밟으며 주저앉은 몸을 건사 중인 윤제호(전 영남일보 편집기자) 선배께 전화를 넣었다. 제호 선배의 퇴사 소식을 뒤늦게 전해준 건 박 선배였고, 그걸 기회로 제호 선배와 근 20년 만에 통화를 한 건 지난 여름께였다. 그 뒤로 1~2달에 1번 산책을 할 때면 제호 선배가 생각나 전화를 넣는다.지난 4일이 세 번째 통화였다. 앞선 2번의 통화에선 내 근황과 선배의 근황을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앞선 두 번과는 결이 다른 얘기를 나누었다.“아이고, 선배님 어느새 선계(仙界)에 드셨습니까?”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듣다가 농반진반으로 이리 말했다.선배는 내가 그동안 몰랐던 모친 사연을 들려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지훈아, 어느 강의를 보니까 누가 이런 말을 하더라. ‘숨은 쉬는 게 아니라 쉬어지는 거라고,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거라고.’ 이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건강해야 한다. 몸을 잘 지켜라.”나는 지난 통화와 달리 선배의 음성에 힘이 있고 여유가 생긴 듯해 반가운 마음에 “어느새 선계에 드셨냐?”고 한 것이었다.그러면서 내 아버지 말씀을 들려주었다.“선배님,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아버지 생전 말씀이 생각나네요. 우리 아버지는 ‘글은 쓰는 게 아니라 쓰여지는 것’이라고 했거든요.”선배는 호응했다.“맞다. 맞다.” “왜, 000 선배 같은 분은 거의 술을 드시고 기사를 쓰시잖아요. 마치 취권의 스승이 술에 취해 제자 성룡을 가르치듯 말이에요.”“흐흐. 그건 예가 좀 잘못된 것 같다.”그러면서 선배는 올여름 파리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에 오른 김우진과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사례를 들었다. 김우진과 한강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둘 다 “공허한 눈빛을 가졌다”는 것이다. 희로애락의 뭉치인 우리네 삶 속에서 기쁘다고 웃고 슬프다고 우는 일희일비, 그 일희일비에 쉬이 동요하지 않는 듯한, 어쩌면 달관한 경지의 실상을 보여주는 그들의 눈빛을 선배는 어느 강의를 들으면서 포착한 것이다.제호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배가 한국편집기자협회가 수여하는 한국편집상 대상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선배는 고향 땅을 밟으며 생기를 되찾고 찾은 생기로 강의를 듣고 들은 걸 갖고 외연을 확장하는 놀이에 푹 빠져있는 듯보였다.달변의 선배는 첫 번째 통화 때와는 달리 세 번째 통화 때는 ‘선계 강연’으로 통화를 독점하다시피 했다.내가 오늘 제호 선배와의 사연을 풀어놓는 까닭은 집사람 신상을 들려주기 위함이다.집사람은 지난 한 달간 무지 바빴다. 연말 연구보고서를 마감해야 했고, 보고서 작성이 끝나기도 전에 인사혁신처 주관의 사무관 공모에 응시했다. 그 와중에 싱가포르 출장을 다녀왔다. 싱가포르를 다녀와서는 이튿날 과천정부청사로 최종면접을 보러 갔다. 싱가포르 출장 이틀 전 계엄령이 선포됐으니 정신이 없는 중에 또 정신이 없었다. 아마 혼(魂)이 달아날 지경이었을 것이다.그래도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사무관 심사에서는 고배를 마셨다.모든 결과가 마무리된 다음날인 어제 저녁에야 집사람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이리 말했다.“정말 대단한 거야. 잘했어. 나는 돼도 걱정이긴 했어. 순리대로라면 2~3년 뒤 사무관을 다는 건데, 느닷없이 사무관이 되면 바론이는 어째 키우나 싶었던 거지. 그 바쁜 와중에 최종까지 간 것도 운이 아주 좋았잖아. 과정이 딱딱 잘 맞아 떨어졌으니까. 근데 딱 운이 거기까지다 생각해야지, 여기서 나쁜 감정을 품으면 뒤에 올 복이 오다가도 도망간다. 그저 순리를 따르면 돼. 우리에겐 더 큰 복이 온다.”나는 덧붙였다.“나는 사무관 승진에서 탈락해 멘탈이 붕괴된 공직자를 여럿 봤거든. 9급으로 시작해 5급에 이르기까지 근 30년이 걸리는데, 30년이면 공직생활의 화룡점정이야. 사무관에 오르느냐 못 오르냐가 마치 인생 결산서 같거든. 때문에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폭음으로 일관하고, 심하면 우울증까지 겪는 거지. 근데 결국엔 시간이 해결해 주거든. 몇 년 지나 물어보면 ‘다 잊었습니다’ 그래. 나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공직 30년의 사무관이 중한가, 인생 30년의 내공이 중한가. 내공이 훨씬 중하다고 봐. 결국 사무관은 허울인 거거든. 사무관이라서 잘 살고 사무관이 아니라서 못 사는 거라면 그건 인생 내공이 변변찮은 거 아닌가. 인생은 결국엔 독고다이거든. 제 실력으로 사는 거라고. 제 실력 없어봐라, 대기업 임원이 무슨 벼슬이고, 이사관이 무슨 벼슬인지. 그건 다 운이야. 진짜 실력은 완장 떼보면 여실히 드러나. 완장 떼고도 흔들림 없이 자기 생을 일구면 그게 진짜 고수지.”나는 이 새벽 또 한 사람을 생각한다. 계엄 정국에서 지난 금요일 구속된 김봉식 서울지방경찰청장이다. 그는 체포 전날(11일) 뉴스1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군인들 (국회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막 (양심고백 같은 것) 하고 그러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당당하게 조사받고 잘못한 게 있으면 책임을 져야죠.”(2024.12.16.일자 뉴스1 기사 참조)그는 구속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했다. 명령에 죽고사는 경군(警軍)의 처세를 아는 사람이다. 내가 겪은 그는 맑고 투명한 사람이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다. 신실한 불자로 제행무상, 일체유심조의 묘를 잘 아는 그가 이 위기를 불심(佛心)으로 잘 견뎌내리라 믿는다.삶은 살아지는 거고, 숨은 쉬어지는 거고, 글은 쓰여지는 이치를 터득한 이에게 삶은 그저 삶일 뿐이다. /심보통 2024.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