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식 ‘삼국사기’에는 영천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기획되었다.”고 기록- 신라 김유신이 611년 영천 중악석굴(은해사 중암암)에서 ‘삼국통일’ 발원- 고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팔공산 ‘공산대왕’ 불리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 ‘조선왕조 선조실록’ “임진왜란 영천성수복전투는 이순신의 공로와 같다.”고 기록- 구한국(舊韓國:대한제국) 가장 오랜 기간 무장 항일투쟁을 벌인 영천 ‘산남의진’- 1950년 6.25 당시 전쟁 역사의 흐름을 바꾼 ‘영천전투’
대구 군부대 이전 예비후보지로 군위·상주·영천 3곳으로 압축되었다. 육군 제2작사 등 5개 부대 이전 후보지가 된 것이다. 현재 관련 군 관계자의 이야기로 군위와 영천이 가장 경합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대구시는 사업성 등을 추가로 평가해 빠르면 3월초 최종 이전 후보지를 결정할 방침이라는 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다.영천이 군부대 이전의 적합지로 당위성을 가지고 주장해야 하는 것으로는 현존하는 제2탄약창으로 인한 지속적인 피해 때문이다. 이 군사 시설은 완산동, 남부동, 대성동, 대의동, 작산동, 북안면 일원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탄약창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1956년부터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어, 그동안 이 지역이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각종 규제로 인해 인근 지역 주민들이 수 십 년간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등 지역균형발전에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다행스럽게 제2탄약창 1지역 가운데 일부가 68년 만에 군사시설보호구역에서 해제됐다. 금노동, 도동, 작산동, 완산동 일대 군사시설보호구역 79만9932㎡(24만2000평)를 풀게 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지역이 군부대로 자리 잡고 있어 영천시 발전에 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3사관학교를 비롯해 군 탄약창 시설이 도심지과 반경 10Km 안에 근접해 있고 도시 확장에도 큰 문제점이 되어 왔다.군부대 유치를 위한 한 방안으로 70여 년간 군부대로 피해를 입은 지역민과 시민 · 사회단체에서 제2 탄약고와 3사관학교를 타 지역으로 이전 요구와 대책을 강구하는 집단행동으로 이슈화시키는 것도 참아온 상태이다.이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 조에 자세히 나온다. 암자 입구에 석굴(石窟)로 된 석문(石門)이 있어 예로부터 돌구무(돌구멍) 절이라 했다. 암자 뒤에는 집채만 한 거대한 화강암 덩이가 층층이 얽혀 만든 석굴이 있다. 석굴은 동서로 길게 뚫려있고 높이는 4~5m 가량이며, 폭은 1m 내외, 길이는 10m 내외다. 석굴 중앙에서 남쪽으로 갈라졌고, 다시 그 중간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마치 바위굴이 ‘口’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굴을 세칭 ‘극락굴’이라 한다. 갈라진 바위틈으로 겨우 한사람이 게 걸음으로 다닐 수 있다. 석굴 남쪽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2호(2001.11.01.)로 지정된 중암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이 석굴이 김유신이 17세에 삼국통일을 맹서하고 신비의 노인 난승(難勝)에게서 삼한통일의 비법을 전수받았던 중악석굴로 일명 장군굴이라 한다. 중악석굴을 중심으로 팔공산 곳곳에는 김유신 장군과 관련 흔적들이 남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중암암과 멀리 떨어진 갓바위 반대편에는 과거 조선시때까지 영천 땅이었던 불굴사 홍주암(현재 경산)이 있다. 김유신이 수도할 때 말울음소리가 들렸다는 명마산(鳴馬山)이 있다. 능선을 따라 갓바위 가는 길에 장군바위가 우뚝하게 서있고, 동봉과 오도봉 일대에 김유신 장군이 수련 중에 마셨다는 장군수가 있다. 김유신이 팔공산의 정기를 받아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고려시대 팔공산은 공산대왕(公山大王)으로 불리며 국가가 어려운 시절에 평안을 기원한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이어져 온 기록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38권에 전해 온다.조선시대 ‘조선왕조 선조실록’에는 민간 의병으로 동북아 최고의 전투병인 일본군을 육지 최초로 물리친 전투로 인해 “영천성을 수복한 공로는 이순신의 공로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병조판서(국방부 장관)를 4차례나 역임한 백사 이항복은 ‘백사별집’에서 “영천성수복전투와 명량해전이 임진왜란 전쟁 중 가장 장쾌한 전투” 라고 기록했다. 이 영천전투를 통해 명나라가 참전하게 된 계기를 만든 전투이자 일본역사와 중국에도 보고된 전투가 이곳에서 있었다. 암울한 구한국(舊韓國:대한제국)시기, 일제의 강제 병합을 당하기 전까지 구한말 의병사에 있어 가장 오랜 기간 무장 항일투쟁을 벌인 영천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의병이 산남의진(山南義陣)이다. 1906년 3월에 시작하여 1910년경까지 활동한 것으로 영천, 청송, 영일, 경주 및 경상남도 울산, 밀양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 무장의병부대이다. 관련 기록은 ‘산남창의지’나 ‘산남의진유사’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영천전투는 6.25 전쟁의 전환점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에 우리 군의 전략과 전술을 통해 필사의 각오로 방어전을 통해 전투의 흐름을 바꾸어 전쟁의 중요한 이정표로 국가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영천을 지켜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운명을 지킬 낼 수 있었던 곳이다.이러한 국가 존망의 고비 때마다 보여준 국난극복의 정신과 DNA가 숨쉬는 영천으로 대구시 관내 5개 군부대 이전되어야 만이 그 역사 속에서 발휘된 영천인의 기개와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 사례될 것이다. 그래서 대구 군부대 이전의 최종 적합지는 ‘국난 극복의 수도 영천’이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