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삼라만상이 겨울잠을 깬다는 절기인 경칩 즈음에 큰 눈이 내렸다. 밭에 거름도 내고 본격적으로 농삿일을 시작해야 할 농민들은 시름에 젖는다. 두 달 사이에 자영업자 20만 명이 폐업했다는 뉴스를 볼라치면 도시 서민들의 삶도 여간 팍팍해 보이지 않는다. 예전 배고팠던 시절을 겪으며 자랐던 세대와 대부분이 부모 찬스로 배고픔을 모르는 세대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도 엄청나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과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사고방식 또한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이런 사람들이 모여 좌충우돌하며 반목하고 있다. 양보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언젠가는 지나가리라.이상호자는 심원이고 호는 월중이며 본관은 영천이다. 소윤공 헌의 16세손인 월중은 성품이 굳세고 곧으며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이후부터 분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단오 정공을 만나보고는 목숨을 바쳐 따를 것을 허락하였다. 마침 아버지의 병환으로 시탕을 드리던 중 입암의 변고가 있어 스스로 순절한 의사들께 면목이 없음을 한으로 여기다가 당시 산남의진이 흥해와 청하, 신녕, 의성 등 고을을 격파하고 다시 바다를 인접한 고을로 향할 때 마침 기계를 경유하기에 그 길목으로 나아가 동엄공을 보고 의진에 자원하여 참여했다. 대오의 선두에 서서 여러 고을의 전투를 치르다가 곧 참모장이 되어 마음을 다하고 죽을 힘을 다했다. 영덕 주방의 전투에서 몸에 중상을 입은 뒤 은신하여 치료하던 중에 대장 정환직이 해를 입자 대세(大勢)가 점차 무너지고 있음을 알았다. 상호는 스스로 일과 마음이 어긋남을 한탄하여 관동지방으로 피신하였다.〈원문〉 李相浩는 字深源이요 號月中이라 永川人이요 少尹公軒之十六世孫也라 性剛直하고 有膽略하다 自倭奴入國之後로 不勝憤悒之氣하야 歸見丹吾鄭公하고 以身許之하다 適以親憂로 侍湯之中에 有立巖之變하야 自恨無面對於地下러니 時에 大陣이 擊興海淸河新寧義城等邑하고 復向沿海할새 路由杞溪어늘 進見東广公하고 自願挺身先驅하야 進戰列邑에 不失行伍하고 未幾에 爲參謀將하야 盡心死力而到盈德하야 周房之戰에 身被重傷하고 隱身治療中에 大將이 亦被害하니 大勢漸敗而自恨事與心違하고 避身於關東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2p> 李相浩 義士 略歷(이상호 의사 약력)李相浩(이상호)는 字(자)는 심원(深源)이오 관향은 永陽(영양)이라 入陣(입진)하여 參謀長(참모장)으로 활약하였고 후에 은신하다 <山南義陣遺史470p>이상호 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경상북도 영일(迎日) 출신이다. 1906년 영천(永川) 일대에서 의병장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조직되자, 이상호는 예안( 安)·안동(安東)에 배치되어 소모활동 및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1907년 8월 산남의진의 본격적인 의병활동이 전개되었으나 10월 입암(立岩)전투에서 의병장이 적에게 살해되어 순국하자 나머지 의병을 이끌고 의병장의 부친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을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청송·진보·청하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후 의진을 위하여 소총 80자루와 군량미 2백 석을 조달하였다. 이어서 주방(周房)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접전 중 부상을 당하여 잠시 은신 치료하다가 적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틈을 노려 탈출에 성공한 후 관동지방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