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27)이쯤에서 팔이 저려온다고 느꼈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체에 힘을 모으던 무게중심이 어느새 머리 쪽에 실려 있었다. 그만큼 푸념은 길었고 하얗게 뜬 밤을 세워버렸다. 수피아가 비교적 관대하게 버텨주던 이야기보따리가 어느 순간 바닥을 보인다 싶더니, 단출해진 몸뚱어리를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자연히 팔베개해준 오른팔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뎌져갔다. 문득 햇살 좋은 봄날이 창가를 공략하고, 날이 밝았지만 이대로 얼마쯤 있어야 될 것 같았다. 한 쪽 날갯죽지에 상처를 입은 파랑새가 오랜만에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사명감이 생겼다. 마음껏 세상 안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못하고 살아온 그 세월이 얼마일까. 몸을 낮추고 몸을 숨기며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탓한 그 세월이 또 얼마일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쟁의 한복판에 낙오되지 않는 사람들의 전투력에 마냥 부러워하던 그 세월이 또 얼마일까. 지금은 사뭇 뜨겁고 사뭇 두려웠던 자신의 푸른 지느러미를 접어 쉬고 싶을 것이다. 창밖, 배롱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채집했다. 날씨가 풀리면 간간히 산책 나온 사람들의 발소리, 말소리가 집안에서 들릴 때가 있었다. 마치 귀머거리가 순간적으로 들은 생소한 소리처럼 들리지 말아야하는 소리에 대한 황당함 같았다. 사람 사는 곳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어야 하는데 수피아를 닮아 가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예의 없는 사람들 같으니. 산짐승이 놀란다는 팻말을 걸어둔다는 것이 그때그때 잊어버리고 생각나는 반복이, 슬슬 자신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수피아의 숨소리는 깊어지고 있었다. 그 새근거림이라니. 내 팔베개에서 폭폭 내쉬거나, 가릉가릉 거리는 잠결이 화음으로 자리 잡고, 중천에 뜬 햇살이 간지럼을 먹여도 차양 막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틸 안간힘이 없다고 느꼈을 때, 달고 혼곤한 잠속에 빠진 그녀와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창틀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밖은 하루해의 꼭짓점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최소한 소리가 나지 않는 손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었다. 먼저 냉장고 문을 열지 않고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녀 성격에 냉장고 속을 채워놓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사건일 게다.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지만 약간의 기대감을 품는다는 것도 일종의 게임처럼 여기고 싶었다. 냉장고 손잡이를 잡았고 마음속에서 숫자를 세었다. 결코 다섯은 넘기지 말자. 더 허기질 빈틈은 만들지 말자. 그리고 넷에 문을 열었다. 가동은 되는지 찬 기운이 훅 빠져나왔다. 허리를 숙여 냉장실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말라비틀어진 밑반찬이며 질색팔색할 정체불명의 음식들을 통과하고, 과일 칸에 뭔가 형태를 갖춘 과일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큰 기대는 하지말자고 다짐하며 과일 칸 서랍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과일의 색깔에서 조금 비켜갔지만 형태에서 조금도 뒤처지지 않은 사과가 손에 잡혔다. 게걸스럽게 맛이 갔는지 어쩐지 묻지도 않고 우적우적 쥐어 뜯어먹기 시작했다. 베어 먹는다는 느낌보다 탄력을 잃은 껍질과 과즙은 오로지 뜯어먹는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그것도 아껴먹으며 잠든 수피아를 한번 보았고, 창밖 하늘도 한번 보았고, 그러면서 울컥 눈물이 고여 들었다. 나무들은 잎을 매다는지 꺽꺽 마른 진통으로 바람결에 스산해지고 있었다. 환장하도록 순댓국이 먹고 싶어졌다. 뚝배기에서 끓고 있는 순댓국에 양념장 듬뿍, 새우젓을 듬뿍 간을 맞추어 세상 같은 건 잊고 싶어졌다. 이런 소박한 꿈을 꾸고 있는 내가, 위험하지 않아 괜찮다고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