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가호 2리 동림마을 뒷산에 가면 의흥예씨의 시조 예낙전(芮樂全)의 묘소가 있다. 그는 고려 인종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역임하고, 부계군(缶溪君)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은 단일 본으로 그 유허지인 의흥(義興)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의흥(義興)은 대구광역시 군위군의 의흥면 일대로 1413년(태종 13)에 의흥 현이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의흥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의흥군이 군위군에 편입되면서 의흥면, 부계면으로 나누어졌다. 예씨의 선대는 중국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문헌이 없어 시조 예낙전 이상의 선대 계보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의흥예씨는 근래 2,000년대에 총인구가 약 1만여 명으로 조선조에는 문과급제자 3명, 무과급제자 5명, 사마시에 5명을 배출하는 등 근대까지도 꾸준하게 다수의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전체 인구수를 대비해볼 때 관직의 진출이 그리 적은 숫자는 아니다. 그의 후손 7세 사문(思文)공은 고려 창왕 때 양천현감을 지냈고, 조선 성종 대에 가정대부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에 추증되었다. 8세 승석(承錫)공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으로 국정의 전면 개혁을 상소하였으며 강원도 전라도 관찰사와 공조참판, 한성부우윤으로 선정을 하였다. 9세 충년(忠年)공은 경주부윤으로 성덕대왕신종을 거두어 경주성 남문루에 안치하여 국보를 오늘날까지 보존케 한 장본인이다. 14세 몽진(夢辰)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운문산에서 7년간 항전하였고, 16세 귀주(歸周)공의 효행은 가문을 빛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24세 준기(俊基)공과 응복(應福)공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았고 24세 춘호(春浩)공은 국회 상공위원장을 지낸 3선 의원으로 3선개헌과 유신체제에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으로 어둠 속 등불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의 산세는 낙동정맥의 한쪽 자락이 동쪽으로 지맥을 뻗어 영천의 보현산을 지나 대구의 팔공산에 이르고, 팔공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군위군 산성면 백학리에서 470m의 봉우리를 일으켜 본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본 혈장은 금성체의 현무봉에서 기복을 하면서 좌선으로 뻗어 내려와 혈장 뒤 입수봉을 일으키고 그 아래에 묘소가 있다. 주변 사신사들은 나름 양호하여 장풍국을 이루고 특히 백호자락은 혈장의 우측을 완전히 감싸주면서 혈장 앞까지 뻗어 내려와 본 묘소의 안산이 되었다. 단, 청룡 자락은 혈장의 좌측을 호위하면서 뻗어 내려왔으나 끝자락은 혈장을 감싸주지 못하고 벌어졌기에 관쇄가 되어주지 못하는 흠결도 있다. 수세는 좌선룡에 우선수로 합법하고 좌우 용·호 자락 사이에서 흘러나온 물들은 혈장 앞 저수지에 모여 묘소에 생기를 공급해 주고 천천히 좌측으로 흘러나간다. 그리고 좌청룡 넘어 동림지에서 흘러나온 물과 우백호 넘어 백학지에서 흘러나온 계류들은 본 혈장의 암공수(暗拱水)가 되어주니 혈장에 한 번 더 생기를 응축시켜준다. 풍수서『인자수지』에서도 “명조불여암공(明朝不如暗拱)”이라 하여 혈장에서 보이는(明朝) 물길이 청룡·백호 뒤에서 흐르는 암공(暗拱)만 못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