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28)어쩌다가 수피아집에 눌러 앉은 지도 일주일째로 접어들었다. 물론 집주인이 나가라며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혼자 내버려 두기에는 위험한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 멍 때리는 습관이었다. 한번 사물에 꽂혔다하면 웬만해서는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고 존재감이 미약해질 때까지 하루 내내 쳐다보기 일쑤였다. 딱히 뭐라 꼬집을 수 없지만,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 자리에서 정물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저러다가 숨 쉬는 것까지 잊고 마는 것은 아닐까. 두 번째는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이었다. 일상의 작은 실수나 정보를 잊어버리는 현상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피로나 수면부족으로 원인이 될 수 있으나, 대체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사소견이 있긴 했지만 이것 또한 위험의 범주 안에서 요동치게 했다. 나이가 들면서 느껴지는 약간의 기억력 저하는 정상적인 노화 과정의 일부라 여기기엔 수피아는 정도가 심했다. 반대쪽 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잃어버렸다며 열쇠수리공을 부를 정도이니 대략난감은 분명했다. 세 번째는 색명이었다. 녹색맹인 증세를 가진 수피아는 신호등의 빨간불과 노란불은 거의 유사하게 인식하고, 녹색 불을 희게 느끼고 있었다. 빨간불에서 움직이며 녹색 불에서 뭔가 혼란스럽게 허둥대고 있을 때, 심각하게 그녀의 몸 가운데를 관통하는 위험천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인이 살만한, 달랑 집한 채 있는 외딴곳을 선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게 옳은 정설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악조건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매번 보이긴 하지만, 결코 뛰어넘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모습에서 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결혼은 피하지만 임신은 강력히 원한다는 수피아에게 그것마저 허락해주지 않았다. 한쪽의 염색체에 문제가 있거나, 정상이라도 돌연변이에 의한 염색체 이상이 그녀의 몸을 거친다면 초기유산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자가 면역기전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 임신을 위해 들어온 정자를 공격해 임신 불가능에, 태반이 태아거부반응을 보여 임신 유지가 불가능한 몸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몇 번, 조심하지 않은 유산일수도 있고 생활습관과 스트레스에서 그 원인이 형성된 꼴이었다. 그녀만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엉망진창의 하루가 고스란히 배당되고 있었다. 이제껏 어떻게 버텨왔는지 모르지만, 가장 버틸 수 있는 영양의 소량으로 버텨왔겠지만 이것도 인연이라고 쉽게 떠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 남겨진 그녀의 앞날이 예견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막중한 책임감이나 의무감은 없었다. 다만 초코파이가 내세운 바로 ‘정(情)’이라는 키워드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주제로 휴머니즘을 강조하였고 독특한 이미지를 통해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랑도 아닌 정으로 수피아를 지켜주고 싶었다. 덧붙이자면 증세가 더 심해지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그렇다. 그렇게 한발만 담그고 싶었다. 딱히 갈 곳도, 할 일도 없는 노령연금수령자라는 사실이 최적이었다. 먼저 불러주지 않을 뿐 아니라, 애타게 찾지 않는 인간관계를 이제껏 형성한 덕분에 자유로울 질 수밖에 없었다는데 한 표를 주고 싶었다. 거기다가 소박하고 평화롭고 서정적인 전원생활을 꿈꾸었다면 그다지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집안일을 꽉 잡고 있는 무보수 집사정도로 자리매김 하고 싶었다. 이곳에 머물 명분을 찾자면, 무엇인지 모를 견고한 공포로부터 수피아를 지켜주기 위해 이 한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놀랍다. 새롭지 않는 척박한 삶에, 언 땅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는 뜨거운 봄날이 내게도 찾아온 형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