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락 의사의 공훈록을 보면 산남의진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에 작성되었음인지 내용상 오류가 더러 보인다. 공적개요와도 내용이 다른 부분이 있다. 전자사료관에서 오류신고를 했으니 정리가 될 터이다. 산남의진은 을사의병으로 정미의병까지 연결되어진다. 참고로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로 일어난 의병이고, 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해서 일어난 의병이며, 정미의병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반발해서 일어난 의병으로 정리되어 있다.徐鐘洛 義士 略歷(서종락 의사 약력)徐鐘洛(서종락)은 字(자)는 주일이요 號(호)는 城湖(성호)이며 관향은 達城(달성)이요 出身地(출신지)는 靑松(청송)이라 性稟(성품)이 廉直孝友(염직효우)하였으므로 鄕里(향리)에 名望(명망)이 있었다 이때에 나라형세가 점점 기울어짐을 보고 그 고향에 뜻 있는 친구들을 규합하여 민간을 보호하는 자위단체라 명칭하고 집포군을 조직하여 國家(국가) 동정을 기다렸다 光武九年(광무9년) 乙巳(을사) 冬(동)에 이르러서 永川(영천)에서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일어나는 연락을 받고 자기 단체를 지휘하여 남 먼저 入陣(입진)하니 인원모집에 큰 공을 세웠다 丙午年(병오년)에 山南義陣(산남의진) 大將(대장) 鄭鏞基(정용기) 大邱(대구)에 체수되고 中軍將(중군장) 李韓久(이한구) 沿海(연해) 지방에 주둔할 때 公(공)은 先鋒將(선봉장)이 되었고 丁未年(정미년) 가을에 軍服(군복) 준비와 기타 군수품 수집으로 고향에 돌아와서 활약하더니 그 사이에 立巖(입암) 敗戰(패전)이 있어 대장단이 무너지고 總指揮大將(총지휘대장) 東广先生(동엄선생) 鄭煥直(정환직)이 大衆(대중)을 통솔하고 列邑(열읍)에 轉戰(전전)하여 戰果(전과)를 올리다가 또 東广先生(동엄선생)이 殉國(순국)하고 그 뒤에 興海(흥해) 崔世翰(최세한)이 大將(대장)으로 취임되어 各部將領(각부장령)들이 各(각) 地方(지방)의 雄山(웅산) 要地(요지)를 분담하여 유격전으로 전개할 때 公(공)은 靑松東部陣(청송동부진)을 영도하고 왜적을 저항하다가 高臥室(고와실) 敗戰(패전)으로 인하여 형세를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公(공)은 종교단체에 가담하여 광복운동을 하다가 광복청천을 못보고 한을 머금고 逝去(서거)하다 <山南義陣遺史495~496p>서종락 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을미의병 때에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산남의진은 고종황제의 시종관으로서 황제를 모시던 동엄 정환직(東广 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아 의거할 것을 지시하여서 형성된 의진이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사계획을 정하고 각 지방 대표를 임명하여 그들이 자기 고을에서 의병을 모으는 책임을 맡겼다. 이때 영천·신녕(新寧)·흥해(興海)·청하(淸河)·기계(杞溪)·죽장(竹長)·영덕·영해·영일·장기(長鬐)·진보·청송(靑松)·영양·봉화 등 영남의 제 고을이 그 대상지였다. 서주일은 남석구(南錫球)·남석인(南錫仁)·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더불어 청송지구 소모 책임을 맡았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각 고을의 포수 및 민병들로 구성된 의병진이 이루어지니 의병진의 칭호를 산남창의진이라 칭하고 진중의 부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대장 정용기, 선봉장 홍귀섭, 중군장 이한구, 후봉장 서종락(서주일),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이경구, 소모장 정순기, 우영장 김태언, 도총장 이종곤. 총 병력 2천 명이 넘자 북진을 계획하고 영덕의진의 신돌석(申乭石) 의진과 손을 잡고 청하읍을 공격하였으며, 이어서 영천 자양(紫陽)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여 일군을 대파한 후 진로를 보현산맥으로 돌려 청송으로 향하였다. 이때 일군이 다시 침공해 와 신성(新城)에서 대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쌍방에 많은 부상자가 났으나 의병 부대는 이들을 격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산남의진은 휴병하였다가 1907년 4월에 다시 거병하였으며, 8월 군대해산 이후 많은 해산 군인들이 들어와 의진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장영도소(將營都所)를 영일군 죽장면 매현리에 정하고 정예 의병 1백여 명을 이곳에 포진시켰다. 이 정보가 누설되어 적의 포위 공격을 당하여 정용기·이한구·손영각·권규섭 등 주요 간부진이 모두 전사하였다. 그후 정환직이 대장이 되어 9월부터 11월까지 청송·자양·신녕·의흥·영덕 등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나, 정환직이 접전 중 득병하여 병을 치료하다가 12월 11일 체포되었으며, 12월 11일 영천 남교(南郊)에서 순국하였다. 1908년 영덕의진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서주일은 남석구와 더불어 의진을 재구성하여 진의 동쪽은 서주일이 서쪽은 남석구가 맡아 활약하였다. 의진에는 최성집(崔成執)·이구옥(李舊玉)·이만파(李萬波) 등이 참여하였으며 각기 50명 내지 1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의성(義城)·안덕(安德)·포항(浦項)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8년 말 경주·영천·의흥·청송의 수비대 등 합동 토벌대를 맞이하여 고와실(高臥室) 전투에서 의진은 큰 피해를 입고 의병운동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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