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29)“창밖엔 봄이 벌써 도착해 있었나 봐요. 코끝이 시리지 않아요. 아저씨, 창문 좀 활짝 열어주세요.” 파를 다듬다가 대충 수돗물에 손을 씻고, 소파에 박혀있는 수피아에게 눈길을 한번 던지고는 군말 없이 창가로 다가갔다. 어쩌면 창문을 열기에는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다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창문을 여는 것으로 대신했다. 생각보다 찬 기운이 밑바닥에서 걷어갔는지 전형적인 봄바람처럼 느껴졌다. 활짝 연 창가에서 멀찍이 떨어지면서, 온몸의 세포가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는 환호를 담아두기에 여념이 없었다. 겨울은 고독했고 세상은 어두웠지만 기어코 저 봄날은 누구에게나 배당되고 있었다. 잠수함처럼 가라앉은, 적막하고 발길이 끊긴 고개 숙인 시간들을 채집하며 살고 싶었던 어느 해, 알고 보면 수피아를 만난 셈이었다. 너무 닮아 고맙고, 길바닥에 우두커니 세워두고 싶지 않은 그녀를 향한 맹목의 열정이 여기까지 당도해있게 만들었다. 파격적이면서 짠물을 떠먹고 커온 독립체처럼 형성된 현실 앞에 수피아는 늘 겉돌고 있었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지만 어쩌다가 관심을 보여도 곧 싫증을 내버리곤 했다. 천성으로 생각했고 워낙 어릴 때부터 고립된 주거지가 가져온 부산물이라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근본에 남아있는 뱃속 애틋한 그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흐느끼는 깊은 어둠을 따라가다 그녀의 실체는 종잡을 수 없이 맴을 돌기 일쑤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늠하기 어려우면서 사정없이 후려치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은, 모두 낯설면서 사무치도록 다가왔을 것이다. 인연은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우연히 연결될 가능성은 곳곳에 매복되어 경우의 수라 불려진다. 서로의 가슴속에 멈추지 않을 울렁증을 닮은 한사람이 나라면, 그런 자격선상에서 손을 놓고 싶지 않다는 것이 요즘 그녀로부터 느껴졌다. 고쳐 앉아 생각해봐도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파는? 또 무슨 요리로 저를 감동시키려고 그러실까. 비누로 손 씻고 내 쪽으로 와보세요. 지금 어마무시하게 입질이 오고 있어요.”약간은 어이없게 웃었지만 어느새 수피아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봄은 확실히 여자의 계절 같네요. 시각, 미각, 청각, 촉각, 후각이 몸속에서 겨우내 잠들어 있다가 일제히 자신을 봐달라고 어퍼컷을 날리기 시작해요. 이렇게.”‘이렇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혀가 내 입술을 벌려놓았다. 순순히 투항해도 목숨을 살려준다는 믿음이 우선시 되는 오후였다. 최대한 겁먹은 표정으로, 두 손도 높이 들고, 날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된다는 항복문서도 준비한 것처럼 내 입안에서 그녀의 혀가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보려고 저토록 차지게 입술은 따글따글 구르고 있을까. 내 손이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더 단단해진 듯 웅크리기도 전에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이 젖꼭지에서 푸득거리고 있었다. 열어놓은 창밖 풍경이 우는 것처럼 그녀의 사타구니로 비집고 들어갔다. ‘파전 해주려고 파를 다듬었어.’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입안에 고인 침과 삼켜버리고 생각해보니 다급하게 옷을 벗어야하는 사정이 있었던 게다. 파전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는, 혹시나 열매를 위해 꽃을 버려야 하는 뜨거움과 같은 맥락이라면 이해가 될까. 그녀의 체액에서 이미 안부를 묻지 않아도 이정표는 만들어져 있었다. 멀리서 이른 뻐꾸기가 울었다. 창문을 닫고 싶었지만 끈끈하게 활착된 수피아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쪼개고 다듬고 둥글어지는 기운이 한 두름의 굴비처럼 엮어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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