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천 출신의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 박창호(朴昌鎬)·이성근(李成根)· 조촐한 제4회 추모재 영천 용화사(야사동)에서 열렸다.· 제1회 추모재(2022년 3월 30일)를 시작으로 올해 4회째를 맞은 추모재· 1919년 3월 30일 덕산시장 독립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만들던 법당 용화사
2024년 3월 30일, 영천시 야사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통도사 영천포교당 용화사(주지 지봉스님)에서는 제4회 독립유공자 추모재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이번 추모재는 영천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두 분의 독립유공자, 박창호(朴昌鎬) 스님과 이성근(李成根) 스님을 기리는 자리였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오늘의 자유와 평화로 이어졌음을 되새기며, 지역사회는 다시금 역사의 숨결을 되새겼다.이번 추모재의 시작은 5년 전, 2021년 대구에서 열린 덕산정시장 3.30 독립만세운동 기념 전시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시회를 주최한 보현사(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동화사 직할 포교당)는 특별한 이유로 영천 용화사를 주목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1919년 3월 30일, 덕산시장 독립만세운동 당시 사용되었던 태극기가 제작된 법당이 바로 현재의 용화사로 이전되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법당 탁자에서 발견된 <국민회보>, <조선독립신문> 창간호 등사판은 현재 용화사 법당이 갖는 의미를 더했으며, 세 번째로는 1911년 조선선종경북포교당으로 사용된 당시 보현사의 주소 압인과 보현사 직인이 찍힌 『선문염송』의 전시를 위해서였다.이 전시회를 계기로, 동화사 학인 스님 열 분 중에서 영천 출신 독립유공자 두 분이 확인되었고, 이듬해인 2022년부터 이들을 기리는 추모재가 시작되어 올해로 4회를 맞았다. 박창호 스님은 속명이 박창호(朴昌鎬)이며, 법명은 월용(月龍) 또는 명룡(明龍)으로 추정된다. 고향은 현재의 영천시 매산동이며, 또 다른 유공자인 이성근 스님은 이명(異名) 이재봉(李在奉)으로, 본적은 영천 신녕면 매양동이다.<공훈전자사료관>과 <국가기록원>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1919년 3월 29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동화사의 지방학림 생도로 재학 중이었다. 동료 학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반월당에 위치한 동화사 출장소(당시 조선선종경북포교당)에서 1박한 후, 3월 30일 덕산정 시장으로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결과 체포되어 징역 10월의 형을 선고받았다.그러나 오랫동안 이 두 분은 역사 속에 잊혀져 있었고, 그들의 후손이나 묘소에 대한 정보 또한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용화사의 주지 지봉 스님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추모재를 발원하였고, 이후 매년 3월 30일에 이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국가보훈부는 현재도 독립유공자의 후손 확인 및 묘소 찾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박창호·이성근 스님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이름 없이 사라질 뻔한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지역사회에서 재조명되고 있으며,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새겨지고 있다.이제 우리는 이 추모재가 단지 의례적인 행사를 넘어, 지역사회의 역사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두 유공자의 묘소를 찾기 위한 지역 차원의 조사와 후손 찾기 운동이 지속되어야 하며, 지역 내 학교, 도서관, 박물관과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가 이 두 스님의 삶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특히 용화사 법당은 단지 신앙의 공간을 넘어, 독립운동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역 내에서도 이곳이 갖는 의미는 점차 커지고 있으며, 추모재를 통해 용화사는 단순한 종교시설을 넘어 지역 역사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또한 3월 30일의 추모재는 단순한 추억이 아닌, 과거의 진실을 현재로 불러오고 미래로 이어주는 ‘역사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용화사는 앞으로도 지역과 함께하는 독립운동 기억의 성지로서, 또 불교계가 역사와 함께 호흡하는 본보기가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