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손양윤(孫亮尹) 의사의 기록이 나온다. 이름의 끝 자가 允과 尹으로 다르고, 공훈록에는 이명을 伯見으로 다르게 쓰고 있다. 그러나 활동 근거지가 현풍이고, 공훈록에 달성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산남의진사에는 의진이 무너지고 광복운동을 하다가 서거했다고 적었는데, 공훈록에는 산남의진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고 광복단 활동만 적고 있으나 적에게 잡혀 감옥살이한 내용이 함께 있다. 살펴볼 일이라 공훈록을 함께 싣는다.손양윤자는 백견이고 본관은 일직이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이후부터 분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의 움직임을 살피다 산남의진이 구산(龜山) 등지를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 수십 명과 더불어 진에 들어갔다. 동엄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 진군 지휘관으로 삼고 의병진의 맨 앞(陣頭)에 서게 하였다. 영덕에서 패전하자 백견은 복수하기를 죽기로 맹세하고 팔공산 등지에서 우재룡을 따랐다. 그 후 적에게 붙잡혀 감옥 생활을 수십 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오래지 않아 죽었다.〈원문〉孫亮允은 字百見이요 一直人이라 自倭奴入國之後로 不勝憤悒之氣하야 探四方之動靜타가 聞大陣之過龜山等地하고 與同志數十人으로 歸從之하니 東广公이 甚奇之하야 爲進軍指揮官하고 使從陣頭하다 至盈德之敗하야 誓死復讎而從禹在龍於八公山等地라가 遂被執하야 繫獄數十年而歸하야 未幾而卒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4p> 孫亮允 義士 略歷(손양윤 의사 약력)孫亮允(손양윤)는 字(자)는 百見(백견)이오 관향은 一直(일직)이라 처음에 大邱(대구) 玄風(현풍)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고 후에 進軍指揮官(진군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후에 八公山(팔공산)에 활약하다가 피금되어 복역하고 출옥하여 광복운동을 하다가 逝去(서거)하다 <山南義陣遺史471p>손양윤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손양윤孫亮尹, 이명 孫伯見, 孫亮伊 생년1878, 사망1939,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항상 조국 광복의 염원을 품고 동지들과 그 방안을 상의하였다. 1916년 채기중(蔡基中)·박상진(朴尙鎭)·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1917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8년 1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었다. 1924년 8년형으로 감형됨에 따라 출옥하였으나 그의 의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출옥후 만주 길림(吉林)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으며, 신현규(申鉉圭)·이병묵(李丙默) 등과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6년 6월경부터 경남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5천여원의 군자금을 신민부에 전달하였으며, 일본인으로부터 현금 5백원, 엽총 2정 등을 빼앗아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지 윤치백(尹致伯)·김보연 등이 만주로 복귀하기 위하여 들어가던 도중 밀정 서(徐)모라는 자의 밀고로 체포됨에 따라, 손봉현(孫鳳鉉)·신현규(申鉉圭)·신양춘(申陽春)·윤창선(尹昌善) 등의 동지가 모두 체포되었다. 그도 서울 태평로에 있던 삼통여관(三通旅舘)에서 동지들과 함께 1928년 7월 30일 체포되었으며, 신현규·신양춘의 두 동지는 일경의 악랄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동년 8월에 재판도 받지 못하고 변사(變死)하였다. 그는 결국 1929년 9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동년 12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2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10여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0년 말에 중병으로 가석방되었으나 10여일만에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