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31)다시 호쾌한 봄날이었다. 깡마른 여자는 자호천으로 나왔다. 비탈진 곳에서 큰키를 자랑하던 백양나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한 쪽으로 쓰러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흑갈색 표피와 회녹색 잔가지가 제 색깔로 버티고 있는 거로 봐서 뿌리는 왕성하게 살아 있었다. 달걀 모양의 타원형 잎은 넉넉하게 백양나무의 위용을 자랑했다. 다만 수직적 성장을 수평적 성장으로 변신을 꾀했을 뿐, 존재감은 뒤처지지 않았다. 모든 나무들이 처음부터 저렇게 누워서 성장한다면, 세상의 영토는 영락없이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잠시, 하늘로 향하는 모든 나무들의 성장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착석하기 좋은 가장자리에 관망모드로 앉았다. 예술가들은 그랬던 것 같았다. 가장자리에서 작품의 구성 요소와 관람자의 시선이 어떻게 따라가는지, 전체적인 균형을 어떻게 이루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이 곧 파악되었다. 당연히 가장자리를 이용하여 공간을 확보하거나, 특정 요소를 강조하고,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깡마른 여자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독특한 무언가로 인해, 물에 기름이 떠돌 듯 섞일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기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나들목에서 닭 천여마리를 실은 4.5톤 화물차가 커브구간을 주행하다가 갓길의 콘크리트 방호벽을 들이받는 기사를 접하고, 깡마른 여자는 꼬리에서 꼬리를 무는 상상을 했다. 전량이 회수되지 않은 몇 마리 닭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뜻하지 않은 생명연장과 자유에 감사하며 도태되어 있던 날개를 펼친다고 기대했다. 그래야만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 보란 듯이 살 수 있다는 푸른 희망이, 창공을 수놓을 거라 믿었다.
혹시 날아다니는 닭들을 보게 되면 꼭 손부채로 응원해준다고 다짐했다. 이런 식이었다. 황당한 몽상 같겠지만 마치 가장자리를 기점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중앙에 위치한 주요 대상으로 유도하고 싶은 예술가들과 별 차이는 없었다. 어릴 적 누군가의 눈에 깡마른 여자의 감성과 재능이 눈에 띄어, 갈고 닦았다면 이미 모나고 돌출된 면이 평가 받았을 것이다. 혼자만의 고민으로 눌러 앉힌 개성과 창의는, 우울과 낯섦으로 그녀를 대변하고 있었다. 삶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마저, 주변 환경과 내통하여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정말 깨어나고 싶다고 빈말처럼 외치고 있었다. 일전에 주워온 사람 머리뼈처럼 그렇게 변하고 말거라 생각했다. 자호천에 산책 나온 다정한 커플이 시선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주변에 살아있는 자호천 생물들이, 뒤척임을 하는 듯 왠지 깡마른 여자의 엉덩이가 한번 들썩거렸다. 어쩌면 백양나무의 성장속도가 엉덩이로 전달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고, 또 다른 커플이 시야를 가리면서 막 지나갈 때였다. 괜히 양미간을 찡그렸다. 봄 햇살 탓으로 돌리면서 첫걸음을 뗐을 때, 멀다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사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총성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했지만, 알고 보니 영화에서 들어본 총성과 참으로 유사했다. 본능적으로 엎드려야 하는데 깡마른 여자는 그러지를 못했다. 시야를 가린 커플이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였고 총성은 한발 더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정적 속에 갇힌 자호천 물소리만 자박자박 흐르고 있었다. “아아악!” 여자커플의 비명은 쇠를 긁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남자커플은 몸을 반으로 꺾인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쉽사리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낮은 포복자세로 소리치는 여자커플을, 깡마른 여자는 여전히 선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