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에 동회가 열리는데 우리 부부는 동네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다.새벽 6시부터 회관 마이크가 오늘 11시에 동회가 열리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알렸다. 며칠 전부터 미리 예보를한 바 있다. 시골에서 가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이장님한데 인사하려 했는데 바쁘니 나중에 만나자는 말에 내용도 모른 채 서운하기도 했다. 한창 포도와 복숭아를 수확해서 포장해 공판장에 가지고 나가는 시기와 겹쳤던 것이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조그만 포터 화물차가 포도니 복숭아니 글자가 적힌 상자를 가득 심고 나가는 것을 몇 번 목격한 후에야 서울내기인 나도 대략 눈치를 챘다.가을걷이가 끝난 때문인지 동회에 모인 마을 분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여유가 넘쳤다.올해는 태풍도 없었고 물과 햇빛이 충분한 날씨가 계속된터라 과일을 주생산품으로 하는 이곳 영천 추곡의 주민들은 편안한 가을을 맞이하는 것같아 보였다.11시에 만나 음식을 준비해서 12시에 식사를 하고 서로 담소도 한 후 1시에 정식 회의를 해서 전달 사항이나 협의 사항을 안건에 부치는 모양새였다.여자노인네(70대 후반에서 90세 이상까지)가 열두 명, 젊은 여자가 여섯 명으로 (여기서 젊다면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 까지?) 일은 이 여섯 명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남자가 열두 명 정도니 전부 해서 30명 정도의 동네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셈이다. 물론 남자 방과 여자 방은 나누어진다. 이날 메뉴는 회덮밥, 영천 장에서 광어를 사 회를 뜨고 나머지 부분은 매운탕용으로 가져왔단다.채소는 상추와 양배주, 오이, 당근에 사근사근한 햇배를 일정한 길이로 길쭉하게 채 썰고 회와 함께 올려서 상에 놓으면 각자 양대로 초고추장을 넣어 비벼먹는 것이다. 설거지감도 많이 남지 않고 준비하기도 맞춤하니 흘륭한 메뉴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나이대의 여자들 중에서 중간 정도라고 생각됐다.노인들이 남편의 어릴 적 얘기를 하며 아는 척을 해 주어 열심히 들었는데 나중에 남편에게 얘기를 전달하려니 얼굴과 이름이 서로 일치되질 않아 애먹었다. 하긴 한 번에 열 명 이상의 새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힘들다. 지금처럼 나이 들며 자꾸 잊어버려 가는 이 시점에선 더욱이.다시 젊은 측으로 옮겨서는 같이 일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 연고도 없이 이곳에 온 귀촌 주부들도 몇 명 되어 은근히 반가웠다. 난 그래도 남편의 고향이어서 온 것이 아닌가? 그이들은 남편들과 함께 귀촌을 준비하다가 여러 곳의 부동산 매물을 보고 나서 자신에게 맞는 듯해서 이쪽으로 왔다는 것이다. 나중에 서로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친구 사귀기는 이제 그만.저녁에 집 주위를 산보했다. 울타리 대신 심은 남천 주위로 나팔꽃 덩굴이 올라가며 예쁜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지 않은가? 저녁이라 수그러졌지 내일 아침엔 다시 여러 송이가 활짝 필 것 같았다 그럼 몇 송이 꺾어서 책상 위에다 꽃아 놓아야지. 여긴 내 땅이니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겠지? 감나무도 노랗고 붉은 감을 잔뜩 매달고 있다. 눈앞에서 붉은 감 하나가 땅에 떨어진다. 물에 씻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나무에서 익은 과일은.나무에 매달린 붉은 감을 딸 수 있게 장대를 구해 달라 해야지. 그건 내 감나무니 어떻게 먹든 언제 먹든 내 맘대로 아닌가? 이런 소유의 기쁨은 지갑에 있는 지폐와는 비교될 수가 없다.서쪽 하늘은 언제나처럼 붉게 물든다. 마을보다 높은 지역에 집이 위치해서인지 동쪽의 일출과 서쪽의 일몰이 둥글게 집을 감싸고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시디를 꺼내 튼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는 라보엠이다. 로돌포가 미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첫 장면. 그는 자신을 ‘시인이며, 창공에 높은 성을 가진 성주’라고 소개하며 그녀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신가요?”오늘 저마다의 성을 가진 영천 추곡의 성주들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당신은 누구신가요?(2017년 10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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