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이나 독립운동가는 살아남은 뒤의 당신이나 그 후손들의 삶이 궁핍함을 본다. 정부가 그들을 보살피지 않으니 이런 나라에서 누가 국가의 위기에 애국충정의 길에 나서려 하겠는가. 정부는 몇 이름난 분만 홍보용으로 이용하지 말고 이런 숱한 분들 천양(闡揚)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최욱조자는 순여이고 본관은 월성이다. 관가정 청의 후손이며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된 석천의 증손자로 1863년 계해에 태어났다. 산남의진을 창의한 처음에 맨 먼저 참여하여 의병들을 모집하고 작전을 도모하였다. 비바람을 피하지 아니하고 각 지역을 왕래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을 본 주변사람들로부터 칭찬을 자자하게 받았다. 단오 정공이 대구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몰래 그의 뒤를 따라서 개인적인 재물을 아끼지 않고 감옥의 책임자와 협력하여 용기를 후원하였다. 산남의진이 행군하던 날 종사(從事)의 임무로 여러 고을들의 정세를 정탐하였고 일이 실패한 뒤에 발자취를 감추려 하다가 적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영천에서부터 청하, 흥해 등 고을을 지나면서 무한한 고초를 겪고서야 집으로 돌아와 자연 속에서 고기를 잡고 나무하면서 살다 끝내 늙었다.〈원문〉崔頊祚는 字順汝오 月城人이라 觀稼亭淸後요 贈嘉善大夫兵曹參判碩天之曾孫也라 哲宗癸亥生이라 起事之初에 首先從之하야 求人謀事에 不避風雨하고 來往各處하야 頗有補讚하고 丹吾鄭公之滯大邱時에 潛行隨後하야 不惜私財하고 結託獄司하야 以圖後援하고 行軍之日에 以從事任으로 偵探列邑하고 事敗之後에 欲爲隱跡이라가 被執於敵하야 自永川으로 歷淸河興海等邑하야 被無限苦楚而歸하야 終老於漁樵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4~55p>                                                                崔頊祚 義士 略歷(최욱조 의사 약력)崔頊祚(최욱조)는 字(자)는 淳汝(순여)오 官職(관직)은 法部主事(법부주사)이며 貫鄕(관향)은 月城(월성)이라 高麗(고려) 文科侍郞(문과시랑) 檢校政丞(검교정승) 觀稼亭(관가정) 淸(청)의 遠孫(원손)이오 壽(수)로서 嘉善大夫兵曹參判(가선대부병조참판)을 贈職(증직)받은 碩天(석천)의 孫(손)이라 父(부)는 壽(수)로서 通政(통정)을 贈職(증직)받은 起烽(기봉)이오 母(모) 淑人(숙인)은 密陽朴氏(밀양박씨)라 檀紀(단기) 四一九六(4196)〮・西紀(서기) 一八六三(1863)・高宗(고종) 癸亥(계해) 八月 三十日(8월 30일)에 慶尙道 慶州府 杞溪縣 鳳溪里第(경상도 경주부 기계현 봉계리제)에서 出生(출생)하다 性稟(성품)이 寬厚(관후)하고 膽略(담략)이 絶人(절인)하였으며 氣岸(기안)이 豪放(호방)하고 親舊(친구)를 좋아하였으므로 儕輩(제배)들로부터 존중한 대우를 받았고 항상 나라 일을 걱정하였기에 시국에 관계되는 소문을 잘 알게 되었다 公(공)의 行年(행년)이 二十(이십)될 때부터 나라 운수가 좋지 못하여 甲申(갑신)정변 乙未(을미)시역이 모두 倭賊(왜적)들의 침략에 생긴 일이고 심지어는 全 國土(전 국토)를 貫通(관통)시킨 鐵道(철도)까지도 왜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니 이 나라 장래를 걱정하는 志士(지사)들의 간장은 항상 울분하더니 光武九年 乙巳(광무구년 을사)에 이르러 왜적들이 우리나라 역적들을 더불고 五條約(오조약)이란 모욕을 강제로 체결하니 우리는 國權(국권)을 송두리째 강탈을 당하고 全國(전국) 上下(상하)에 울분한 심정을 참을 수 없어 이 원수를 어떻게 하면 설부할 수 있느냐고 서로 기회를 살폈다 이때에 侍從臣(시종신) 東广先生(동엄선생) 鄭煥直(정환직)이 光武帝(광무제)의 密詔(밀조)를 받고 그의 아들 丹吾公(단오공) 鏞基(용기)를 嶺南(영남)에 보내서 義兵(의병)을 모집하여 왜적들을 격퇴시키고자 하였다 이 소식이 全國(전국)에 알려지는 것이 밤거리에 횃불같이 되어서 愛國志士(애국지사)들은 遠近(원근)을 불구하고 모두 머리를 둥이고 찾아든다 公(공)은 인근 동에 있어서 남 먼저 들어가서 협조하기를 지원하고 그 볼일에 나서서 풍우를 피하지 않고 그 지방 要人(요인)들을 손잡고 求人謀事(구인 모사)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기초공작에 큰 도움을 세웠다 丙午年(병오년)에 陣勢(진세)를 구성하여 행진을 시작할 때 丹吾鄭公(단오정공)을 大將(대장)으로 추대하고 部署(부서)를 조직하매 公(공)은 지방 정탐으로 책임을 띠고 일선에 활약하다 丹吾公(단오공)이 大邱(대구)에 체수로 있을 때 軍器監(군기감) 鄭沃基(정옥기)를 따라서 대구에 가서 자기의 돈으로서 獄後(옥후)에 경비를 보조하다 丁未年(정미년)에도 前年(전년)과 같이 지방정탐으로 책임을 지고 각지로 활약하다 戊申(무신) 己酉(기유) 兩年間(양년간)은 千辛萬苦(천신만고)를 겪고 九死一生(구사일생)의 길을 밟으면서 慶尙道內(경상도내)의 큰 산 지역을 다 찾아서 山南義陣(산남의진)의 각 분대에 연락을 전하다 庚戌年(경술년)에 이르러 왜적들에게 國土(국토) 全部(전부)를 피탈 당하고 의병들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公(공)은 왜적에게 被擒(피금)되어 數個月間(수개월간) 극형을 받았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으므로 석방되다 <山南義陣遺史434~4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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