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 7-10번지(흥무로 71)에 가면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의 명장 김유신(595~673년) 장군의 묘가 있다. 그는 원래 금관국 김수로왕의 12대 후손으로 가야 왕족 출신이며 신라에 귀순한 후,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하고 당나라도 물리친 신라의 명장이고 정치가이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은 법흥왕 19년(532년)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곧바로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 장군이 바로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이고, 그는 무장으로 활동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을 잡아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김무력의 장남이었던 그의 아버지 김서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고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김유신은 성장 후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신라 제26대 진평왕부터 제30대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하기를 김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을 대승으로 이끈 공로로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으며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을 추대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며 이찬 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그가 바로 29대 태종 무열왕이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였고, 유신은 무열왕 2년(655년)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된 후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와 혼인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의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으며 무열왕 7년(660년) 초에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그는 당나라 군사와 합류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함락시켜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 군사도 몰아냈다. 김유신은 673년 79세의 일기로 자기 집에서 사망하였고, 훗날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이곳의 산세는 낙동정맥인 경주시 서면 인내산(433m)에서 남동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건천읍 용명리 구미산(594.4m), 그리고 대곡리 용림산(520m)을 거쳐 충효동 송화산(275.5m/옥녀봉)에 이르러 이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김유신 장군 묘는 주산인 옥녀봉에서 남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내려오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혈은 일반적으로 배산임수의 원칙에 따라 산자락의 끝 지점인 용진처(龍盡處)에 맺는 것이 원칙인데 이곳은 용진처가 아닌 중간지점이라 지맥이 그냥 통과해 버리는 과룡처이다. 일부에서는 혈장 뒤편 입수가 분명하다고 하여 명당 길지로 해석하고 있으나 풍수에서는 과룡지장삼대내절향화(過龍之葬三代內絶香火)라 하여 이러한 곳에 장사를 지내면 후손이 끊어지는 흉지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곳의 수세는 양호하다. 묘소는 남향이고 우측 충효동 쪽에서 흘러나온 제법 큰 소하천이 묘소 앞쪽을 지나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에 합류하여 흘러나가니 이 산자락을 완전 U자형으로 감싸 준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곳을 역수국(逆水局)이라 하여 최고의 수세 조건으로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