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이 출현한 구한말시기에 언론인들의 대부분은 개신교의 신앙을 가지고 유학을 다녀온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개혁과 자주 독립이라는 당시의 절박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신문’이라는 매체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 시대의 과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중을 계몽하여 개화개혁으로 나아가야한다고 보고 일종의 사회운동의 수단으로 신문을 발행했다.‘인쇄조보’가 신문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처음 언급한 인물로는 ‘최초의 조선인 미국 대학 졸업생’이자 구한말의 정치가, 박영효와 함께 1883년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한 구당 유길준(矩堂 兪吉濬, 1856 ~ 1914)이다. 1895년 간행한 ‘서유견문(西遊見聞)’ 제17편 신문 항목에서 처음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길준은 “신문을 시작한 근원을 추구해보면 우리나라의 조보(朝報)같이 관리에게 베껴서 돌리다가, 그 뒤에 일반인 가운데도 부유한 자들은 세를 내고 (인쇄를 해서) 받아 보았다. 그러다가 삼백년 전에 이르러서야 영국과 이탈리아 두 나라에서 인쇄하여 발행하는 신문이 나오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두 번째로 <민간인쇄조보>가 세계최초의 일간신문임을 밝힌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번역가, 역사학자인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이다.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며 시와 역사서 외에도 신문 관련 활동을 하였고 잡지도 발간하였다.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창간하였으나 일제에 의한 비판적인 논조 때문에 폐간되었고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객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1935년 9월 11일부터 1935년 11월 27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고사천자(故事千字)’ 「추(秋) 춘추관(春秋館)」편에서 확인된다. 최남선은 여기서 서양 신문의 기원을 먼저 설명하면서, 조선시대 인쇄조보 발행이 서양 인쇄신문 발행과 비슷한 시기라는 점을 주목하고, 만일 선조10(1577)년 인쇄조보가 탄압으로 중단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인쇄신문의 영예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세 번째 인물로는 언론사학자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이다. 일제강점기 날카로운 필치로 1920~30년대에 대중을 깨우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1929년〈조선일보〉부사장을 거쳐 1931년 사장이 되었다. 1919년 이후 20여 년 동안 9번에 걸친 투옥으로 7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그는 1927년 “조선신문사론”을 발표하였다. 1935년 이를 보완해 “조선신문소사”를 저술하여 신문에 기재하면서 우리나라 신문의 시초를 <필사조보>와  1577년 <민간인쇄조보>로 보았다. 근대 언론 신문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선조수정실록』, 율곡 이이의『석담일기』, 『연려실기술』등 4곳에 기록된 문헌을 바탕으로 「민간인쇄조보」를 조선신문의 기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조선 1577년 선조의 탄압으로 「민간인쇄조보」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인쇄신문의 영예를 차지했을 것이라며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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