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보는 지극히 위험한 정치적 매체인 신문이다.· 조보는 대통령비서실에서 나온 국정 기록물이 1면에 장식된다.· 조선시대 문자는 양반의 권력이자 밥이다.· 문자 즉 정보가 민간인에게 나와 돈을 받고 파는 신문(민간인쇄조보)으로 탄생. · 조선 1577년 세계최초일간신문 <민간인쇄조보> 영천에 있다.
우리나라 필사조보가 갖는 놀라운 부분은 정보의 개방주의이다. 아마 조보 자체는 ‘邸報’ 등으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그 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조보朝報’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중종(中宗) 대부터이다. ‘중종실록’에 처음 ‘조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중종 3년에 공신 책봉과 관련된 논의하던 중에 성희안(成希)이 지난번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북경으로부터 요동에 도착하여 필사조보를 보니 논박을 받아 일정(一定)한 직무(職務)가 없는 벼슬로 강등된 사람이 많았다.”고 말하는 대목이다.조선의 국경을 넘어 중국의 요동에서 우리나라 조선의 ‘필사조보’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물며 앞서 보았듯이 조선의 필사조보는 임금의 동정과 조정의 일에 대해 지극히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중종 10년 경연 자리에서 대사헌이 모든 국사에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승정원이 잘 단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자, 임금이 “무릇 조보는 다만 양사(兩司)에게 알게 하는 것이니 일체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대목이다. 당시 중종(中宗) 임금은 조보의 유통 범위를 사간원․사헌부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조선시대의 필사조보와 같은 시대의 서유럽이나 중국과 비교하면 무척 많은 내용과 더불어 때로는 다소 위험하다 싶을 만큼 예민한 정치적 정보까지를 담아낸 정치적 매체였다. 그것은 임금도 그 제도에 따라야 했었던 조선의 공론정치가 보여준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개방성을 불편하게 보는 시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조선 중기 사림의 공론이란 여전히 대다수 하층민과 여성을 도외시한 소수의 양반-지식인 엘리트를 위한 제한적인 것이었다. 조정에서 나눈 최고위층과 통치 계급끼리의 행위를 문자로 읽기도 힘든 초서인 난초체로 기록한 조보는 ‘민간과 하층민’에게 전달되어 깨우쳐 주는 매체는 아니었다. 문자는 사대부의 권력이자 자신의 밥이었다. 그 권력과 밥을 아래의 계층에게 줄 수는 없었다.조선 공론정치를 담은 조보의 ‘내적’ 취약함은 무엇이었는가? 조선의 공론정치란 동시에 붕당 · 당쟁의 정치이기도 했다. 거기에 협의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한 성리학의 도덕정치는 물러설 수 없는 대립을 조장했다. 지금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유사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조보가 등장하고 발전했던 조선 중기는 사림정치가 붕당의 대립으로 전환되어 가던 시기이기도 했다.매일 승정원일기와 거의 같은 정도의 정보를 담아 중앙과 지방의 관리는 물론 민간의 유력 양반들에게까지 전해졌던 조보를 통해서 공론의 범위는 대간에서 사림․ 유생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1577년이라는 아주 이른 시기에, 그 필사조보의 활판 인쇄되어 상업적 판매가 시도되었다.필사조보를 민간에서 활자로 인쇄해서 판매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정보를 백성이 한번 쥐어보고자 한 것이다. 조보를 그토록 힘들게 여러 사람이 베끼고 또 베끼지 않고 다량으로 인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했겠는가? 선조의 진노로 이런 시도가 석 달만에 좌절되었다는 점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근대 이전에는 인구와 지리 정보를 비롯해서 국정과 관련된 사항은 대개 비밀이어야 했으니까. 게다가 승정원일기 수준의 내용이라고 하면 임금과 국정을 논의하는 민감한 내용이 그대로 수록된 것이다. 정작 놀라운 것은, 민간인쇄조보의 폐간 이후로는 민간에서 필사조보를 인쇄하려는 시도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왕명이라지만, 어떻게 한 번 시도된 정보의 민간 이전이라는 혁신을 완전히 포기될 수 있었을까? 궁금함이 든다.그래서 1577년 민간인쇄조보의 실물이 거짓말처럼 우리 눈앞에 놓여 있지만 조선시대의 조보라는 제도를 둘러싼 퍼즐은 아직도 미완성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