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1일 KBS ‘다큐On’에서 ‘그곳에 소년들이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6.25전쟁 당시 학도병 이야기가 방영됐다. 그 이전 4월18일 학도병으로 전사했던 삼촌 조필제 님을 비롯한 세 분의 이름을 모교인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세워진 추념비에 추가 각명하는 행사에 다녀왔다. 그 행사에서 나의 가형(家兄)께서 읽었던 추념사에 눈물을 떨구었었다. “~ 참혹했던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320명 학생 중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던 선배님들이 139명이라니…… 실로 놀랍습니다. 그 까까머리 소년들이 겪은 전쟁터는 얼마나 낯설고 무서웠으며, 얼마나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또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의 빈자리를 보면서 죄인 아닌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 돌아온 친구들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 이제까지의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너무 아프다. 그러기에 100년 뒤의 우리가 쓰는 역사는 웃음꽃이기를 희망한다.권대진자는 경조이고 본관은 안동이며 동봉(東峰)1)의 후손이다. 성품이 맑고 단아하고 문학과 훌륭한 행실이 있었으며 자못 음양(陰陽)과 관상(觀相)의 술(術)이 있었다. 포암 권주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시대의 그릇됨을 슬퍼하는 마음이 있어 1906년 병오 산남의진을 꾸리던 초기에 온 힘을 다해 뜻이 있는 사람들과 서로 연통하고 모의하였다. 산남의진이 출진하던 날에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연달아 의진의 장수들이 변고가 생기자 권대진은 울면서 “훗날 죽어 순절한 의사들을 볼 얼굴이 없구나.”라고 맹세하고 1908년 무신 봄 최세한을 따라 참모장이 되었다. 그러나 일이 끝내 이롭지 않게 되면서 발자취를 감추었다. 〈원문〉權大震은 字景祚요 安東人이요 東峰之后라 性이 淸雅有文行하고 頗通陰陽觀相之術하고 學於逋菴權公周郁之門하다 及天下大亂에 有慨然之志하야 丙午起事之初에 極力通謀하고 出軍之日에 因病不入이라가 未幾에 有連喪將領之變하야 泣誓曰無面從諸公於地下矣라 하고 戊申之春에 從崔世翰하야 爲參謀將而事竟不利하고 遂遯跡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6~57p>權大震 義士 略歷(권대진 의사 약력)權大震(권대진)은 字(자)는 景祚(경조)요 貫鄕(관향)은 安東(안동)이라 처음에 靈山(영산) 密陽(밀양)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고 후에 參謀長(참모장)으로 활약하다가 후에 은신하다 <山南義陣遺史473p>권대진의사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1869년 3월 7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리(立巖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조(景祚)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문절공(文節公) 권중화(權仲和)의 6세손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 1558~1611)의 후손이다. 입암리에는 지금도 동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입암정사(立岩精舍)가 있다. 어려서부터 성품은 밝고 단정하였으며, 향리에서 학행이 높은 포암(逋菴) 권주욱(權周郁, 1825~1901)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학뿐 아니라 음양·관상술에도 밝았다.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당시 현실을 ‘천하대란(天下大亂)’이라 하여 개탄하고 국권 회복의 길을 찾던 중,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이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키자 의병부대의 지역 활동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박한종(朴漢宗)과 함께 경남 영산(靈山)·밀양(密陽) 지방을 책임지고 의병 모집과 군수물자 조달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으나 신병(身病)으로 직접 의병에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1907년 10월 8일 영일군 죽장면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등 여러 부장과 병사가 전사하자 “죽어서도 여러 장령을 만날 면목이 없다”라고 하며 애통해하였다. 입암전투 패배 후 전사한 정용기 대장을 대신한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남은 병사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다시 일으켰으나 1907년 12월 일본군에 잡혀 경북 영천 남교(南郊)에서 처형당하였다. 구심점을 잃은 의병부대는 후봉장 이세기(李世紀)·소모장 정순기 등을 중심으로 1908년 3월 영천 보현산(普賢山) 거동사(巨洞寺)에서 농고(農皐) 최세윤(崔世允)을 의병부대의 제3대 대장으로 추대하고 부대를 다시 꾸렸다. 이때 최세윤을 따라 의병부대에 들어가 본진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자료에 따라 이때 중군장이 아니라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의병부대는 본진과는 별도의 지대를 나눠서 남으로는 밀양과 울산, 북으로는 봉화와 영양에 이르기까지 20여 지역에 70여 명의 지대 책임자를 배치하여 유격전을 벌이도록 하였다. 흥해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본진이 1908년 3월 25일 덕산령전투(德山嶺戰鬪)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일본 군경의 기습 공격에 밀려 활동이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지역을 맡은 지대장들도 고전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본진은 흥해에서 감포(甘浦) 해안, 안강(安康) 옥산(玉山)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의성 춘산(春山) 방면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나 같은 해 7월 의성 접경 지역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를 흔히 ‘의성전투’라고 하는데, 이 전투를 끝으로 은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