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중에 포항에서 지진이 있었다.많은 사람이 다치고 재산 피해를 입은 첫 지진 때 나는 공교롭게 백내장 수술을 하느라 서울에 있었다. 영천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포항이다.그 뉴스를 들은 순간 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경주에 이어서 포항이라니. 언제 영천의 일이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경상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일이 아니라 할수 없겠다. 이틀 후에 영천 집으로 내려왔다. 3사관학교 정문 주변 넓은 공터를 지나는데 그곳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만개한 황금빛 은행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오래된 은행나무란 주로 향교 근처에서 연륜을 뽐낼 텐데 산속이 아닌 툭 터진 공간에서 하늘로 쭉 뻗은 채 황금빛 풍성한 이파리를 가득 달고 있으니 또 하나의 태양이 뜬 듯 주변에 광채가 난다. 마음이 불안했었는데 그 아름다운 은행나무에 큰 위로를 받았다.집에 돌아와 보니 고택이며 정자며 무궁화 하우스와 본채 모두 무사하다. 이리 저리 문을 열어보고 흔들어 보면서 왈칵 눈물이 나왔다. 붉고 누른 단풍이 아직 아름답고 고택도 무사한데 피해를 본 포항 시민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친척 되는 아랫집 전오 할매가 호박 하나를 가져다주면서 지진 때 얘기를 하신다. 누가 자길 흔드는 것처럼 몸이 흔들려서 내가 어디가 아픈가? 생각하셨다는 거다. 이분은 우리보다 다섯 살 나이 젊은 아재의 어머니다. 그러니 할매 맞다. 아흔두 살인데 나이를 얘기할 때면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정말 귀여운(!) 분이다.“아이구, 호박 맛있더라구요. 벌써 세 개째 주시는 거잖아 요”내 딴에는 정확히 한다고 했는데 그 분 왈,“아니지. 첫 번째 우리 집에 왔을 때 주었재. 담엔 내가 보자기에 싸서 주었재. 다음에 차 타고 나갈 때 큰 것 건네준 적도 있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건 네 개째지.”나는 좀 당황했다. 벌써 세 개나 먹었었나? 뭘 만들어 먹었지? 나물을 해 먹었고 부쳐 먹었고, 된장찌개에 넣어 먹었다. 하나하나 더듬어 생각해 낸 다음엔 할매의 기억력에 탄복하고 말았다. 그래. 호박을 빨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오셨지. 난 그걸 깜박했다.내가 아흔두 살까지 살면서 이 분처럼 초롱초롱한 기억력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이 분처럼 탐스럽고 하얀 머리털을 갖고 살 수 있을까? 할매는 언제나 여유 있고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다. 아흔둘! 나의 지금 나이보다 20년이 휠씬 더 지난 나이다. 아혼 둘이란 숫자는 생각하기도 싫은 숫자였는데 할매를 보면 그 나이가 되어서 살아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분명히 할매는 자신의 인생에서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식민지 시대에도 살았고 한국 전쟁 때도 살았다. 오늘도 잠깐씩 여진이 감지되기도 하는데 할매의 인생 중에서 지진은 없었겠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시간은 많지 않았을까? 지금 어쩌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지진이나 그보다 더한 일은 제발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택에 어스름이 내려않는다. 건너편 침수정의 모습도 흐릿해진다. 정자를 지으신 조상님을 생각하며 기운을 내게 해달라고 빌어 본다. 언젠가 경주에 갔을 때 택시 기사님이 힘든 경주의 경제를 얘기하면서 한숨 쉬던 기억이 떠오른다. 역사 도시이고 관광 도시인 경주이니 얼마나 충격이 많았겠는가. 이번에 다시 포항이라니. 하지만 모두의 힘을 모아 복구하는 길만이 살 길인 것 같다. 예상 못했던 자연 재해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 수능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힘든 수험생들, 모두의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 모두가 정성을 모아 포항 시민을 도와야 하겠다.힘내라, 대한민국!  (2017년 1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