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37)오랜 세월, 지하실과 자호천으로 이어주는 나무문짝이 작은 바람에도 덜컹거렸다. 그만큼 세월에 기댄 세월이 얼마일까. 그러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쉽게 눈에 띄지 않은 지하실과 지하실로 이어지는 게으른 외출 덕분이었다. 나무문짝은 계절 따라 수풀 속에서, 모래더미 속에서 꿋꿋하게 버텨왔다. 그렇지만 잦은 들짐승과 비둘기들의 왕래로 제 모습을 지키지 못한 최후를 맞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나오기 위해 나무문짝을 열었다기보다 건드린 쪽에 가까운 몸짓이었지만, 스스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은,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이고 그 쏠림에는 변명할 수 없는 세월이 옹이처럼 들어차 있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지탱과 버팀을 돕고 싶어 실팍한 나뭇가지를 기울여진 쪽에 임시방편으로 묶어주었다. 나무문짝이 말하고 있었다. 난 틀린 것 같아. 살만큼 살았으니 여한도 미련도 없지만, 물결로 달려와 헹가래치듯 여전히 푸른 자호천이나 지켜주시게. 그 음성이 표창처럼 박혔다. 어쩌면 수피아가 내치지 않는다면 한동안 이곳에서 세월타령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무문짝도 온전히 내 몫이고, 모래사장과 숲으로 연결된 자호천도 내가 품어야 될, 산책길에서 만나는 합류지점인 셈이었다. 저기, 무심코 자호천을 건네다 보았다. 목을 축이는 한 무리의 사슴이 붉은빛을 띤 갈색 몸으로 텀벙거렸다. 출입구가 움푹하여 은닉하기 좋은 나와의 관계를 무심코 지나친 것 같았다. 엉덩이와 넓적다리의 안쪽에서 차오르는 힘이 꼬리의 밑쪽으로 전달되는 듯, 하얀 띠로 이어지고 갑자기 인기척에 저마다 서두르고 있었다. 건너편에 산책 나온 사람들의 탄성이 메아리쳤다. 그들 때문이었다. 6마리 정도 작은 무리가 신속한 몸놀림으로 달아날 때 꼬리를 세워 같은 방향으로 뛰는 장엄한 구경거리를 목도하게 되었다. 매우 예민한 청각과 후각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다가 천적의 흔적을 감지하는 즉시 동시에 달아나는데, 서로 뒤섞여 방향을 바꿔가며 뜀뛰기를 하듯 달아나기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오줌을 참듯 어정쩡한 자세로 지켜봤다.
이럴 때 수피아가 옆에 있었으면 어떤 감탄사에, 어떤 표정으로 내 감동에 자신의 감동을 얹어 돌려줄까. 그렇다. 아직 수피아가 돌아오지 않았다.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서에 간 시간이 길어져 있다고 비로소 느꼈다. 무엇을 어떻게 수사에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충분히 돌아올 시간을 넘긴 것 같았다. 그제야 불안했고 조금 전 사슴을 향한 충만한 기운이 여지없이 여위어가고 있었다. 나무문짝을 몇 번 흔들어보다가 심드렁하게 모래더미를 발로 찼다. 따발총처럼 후두두둑 모래알갱이들이 앞으로 흩어졌다. 그러면서 자호천의 저녁을 보고 있었다. 저녁사이로 빗금 친 순한 햇살들이 서산으로 몰려가고 와락, 풍경하나가 시선을 끌어당겼다. 멀리서 보아도 수피아였다. 자호천 곁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충분히 저녁노을에 취한 가여운 영혼처럼 비틀대면서, 사슴무리가 머물다간 자리를 아는 것처럼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엇에 홀리기나 한 듯 한걸음에 뛰어가 수피아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 없이, 내 출현에도 동요되지 않고 먼발치의 새소리를 담아 입으로 가볍게 내뱉고 있었다. 뻐꾸기도, 뜸부기도, 종달새도, 비둘기도 수피아 속에서 울음이 되어 밖으로 날갯짓하고 있었다. 묵묵히 진한 감동으로 튀어 오르는 피라미들의 저녁행렬도 보았다. 이것이 자호천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