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산남의진 중군장 이석[이세기] 장군의 묘소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김용석 자양면이장협의회 회장님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자양면을 설득하여 이룬 결과다. 그리 깊은 산속은 아니라도 기룡산 골짜기에 묻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는데, 묘소 앞까지 시멘트 포장길이 놓이고 사방공사로 산골짜기를 정비하고 있는데다 이제 임고농협 보현지소 앞에서부터 갈림길 두 곳에 「산남의진 중군장 이석장군 묘소」 가는 길의 이정표가 세워졌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차제에 많은 분들이 그 분의 넋을 기리는 참배의 걸음을 해 주시기를 기대해본다. 윤무건본관은 파평이고 대대로 청송에서 살았다. 신체의 힘이 무척 좋았고 활과 총을 잘 쏘는 재능이 있어 산남의진에 들어간 초기에 제2초장(哨將)이 되었고 뒤에 도포장이 되었다. 의성의 전투에서 몸을 떨쳐 힘껏 싸워 적의 우두머리를 공격하여 죽이고 연달아 여러 고을들을 공격할 때는 반드시 선두로 나갔기에 자못 용감하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전말(顚末)은 상세하지 않다.〈원문〉尹武建은 坡平人이라 世居靑松하다 力過人하고 有善射之才하야 入陣之初에 爲二哨將하고 後爲都將하야 義城之戰에 奮身易戰하야 擊斬倭酋하고 連擊列邑에 必進先頭하야 頗有勇名이런니 顚末不詳이라<山南倡義誌 卷下57p>尹基烈 義士 略歷(윤기열 의사 약력)尹基烈(윤기열)은 字(자)는 武建(무건)이요 貫鄕(관향)은 坡平(파평)이라 靑松(청송)에 世居(세거)하였다 檀紀(단기) 四二O一(4201), 西紀(서기) 一八六八(1868), 高宗(고종) 戊辰(무진)에 出生(출생)하다 性稟(성품)이 剛直(강직)하고 臂力(비력)이 過人(과인)하였으며 少時(소시)부터 천렵을 좋아하여 善射手(선사수)로 有名(유명)하였다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일어날 때에 公(공)은 郡內(군내)要人(요인)들과 같이 入陣(입진)하여 처음에 二哨長(이초장)이 되었고 뒤에 都炮將(도포장)으로 임명되어 陣頭(진두)에서 奮身力戰(분신역전)하여 義城(의성) 접전에서 倭酋(왜추)를 격참하였고 항상 접전이 될 때는 험란을 피하지 않고 활약하였다 丁未(정미) 臘月(납월)에 李世紀(이세기) 等(등)과 같이 長鬐邑(장기읍)을 습격하여 그곳에 주둔하는 왜적들을 전부 포살시키고 왜적의 分派所(분파소)와 稅務署(세무서)와 郵遞所(우체소)와 書記廳(서기청)과 其他(기타) 建物(건물)에도 적들이 중요하게 사용하는 것은 전부 燒却(소각)하다 公(공)은 그 전투에 倭酋(왜추) 森伊太郞(삼이태랑)을 격살시키고 그의 軍刀(군도)를 노획하여 平生(평생)에 그 칼을 차고 있었다 戊申(무신) 己酉年(기유년) 간에 山南義陣(산남의진)이 各(각) 부대를 各地(각지)로 분파하여 큰 산을 점령하고 유격전을 시작하여 항전할 때에 靑松(청송) 郡民(군민)들은 동서 양진을 설시하여 두고 군민 남녀노소가 총동원이 되어 최후까지 분투하였다 그때에 公(공)은 本郡(본군)에 돌아와서 군민에 정신 작흥을 시켜서 물심양면으로 충분한 협조를 얻어서 持久戰(지구전)을 준비하더니 말경에 큰 운수가 넘어가고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公(공)은 전장에서 오른다리에 총상을 입고 그 자리가 종증으로 晩年(만년)에 難治之疾(난치지질)이 되어 醫却(의각)을 못하고 光復(광복)을 못보고 檀紀(단기) 四二五O(4250), 西紀(서기) 一九一七(1917), 丁巳(정사) 三月十五日(3월15일)에 恨(한)을 머금고 逝去(서거)하다  <山南義陣遺史457~458p>윤기열의사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1878년 3월 23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부남면(府南面) 구천동(九川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이명은 윤무건(尹武建)이다. 1906년 3월 산남의병(山南義兵)이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지례(知禮)·고령(高靈) 지역의 소모(召募)를 담당하였다. 산남의병이 결성된 뒤 청송 출신의 지사들과 함께 참여하여 2초장(哨將)·도포장(都炮將) 등에 임명되어 의성(義城)·청송·진보(眞寶)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월 이세기(李世紀)와 함께 약 60명의 의병들과 장기(長鬐)를 공격하여 일제 경찰을 처단하고 관공서를 파괴하는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의성(義城)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을 처단하였다. 의병 활동 중 오른쪽 다리에 입은 총상으로 1917년 3월 1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5-07-02 19:46:59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이 사람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