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覺)’은 더 이상 출가 수행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상 속의 평범한 삶 속에서도 자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며, 이를 대중적으로 풀어낸 대표적인 형식이 바로 ‘각설이타령’이다.각설이타령이 가진 문화적 상징성과 표현 양식을 통해 깨달음이 어떻게 대중적으로 전파되고 이해되었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각설이타령은 본래 떠돌이 광대나 걸인이 장터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와 해학을 통해 시혜를 구하는 방식의 구술 예술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유희가 아닌, 인간 존재의 비참함, 욕망, 삶의 무상함 등을 토로하며 대중과 공감하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각설이 타령을 한자로 표기하면 ‘覺說理 打令’이다. 깨달을 각(覺) 말씀 설(說) 이치 이(理) 즉 깨치지 못한 민중들에게 세상 이치를 알려준다는 뜻이다. 이에 관한 원조는 삼국시대 신라의 원효대사다. 원효대사께서 한때 부처님의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 중생들이 알기 쉽도록 바가지를 치며 민중 속에 들어가 법문을 노래하며 교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각설이타령은 “얼씨구”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얼씨구”는 ‘얼의 씨를 구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얼 씨구 씨구 들어간다”라는 얼의 씨가 몸 안에 들어간다 라는 뜻이고, “저 얼 씨구 씨구 들어간다”라는 “저 얼의 씨도 몸 안으로 들어간다” 는 뜻이다.“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이 말은 “전생에 깨달았던 영(靈)은 죽지 않고 이 세상 살아있는 동안에 다시 태어난다’ 라는 뜻이다.리듬감 있는 장단과 후렴구 반복, 해학과 풍자의 조화, ‘빈자’의 시선에서 본 세상 모습이 녹아 있다.각설이타령에는 다분히 불교적 색채가 내포돼 있다. 특히 무상(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성은 각설이타령의 핵심 정서다. 떠돌이 인생, 한순간의 복과 불행이 뒤섞인 현실은 삶의 덧없음을 표현한다.그리고, 고(苦)와 해탈이다. 세상살이의 고통과 이를 노래로 풀어내는 각설이의 언행은 고를 인정하고, 해탈로 향하려는 의식의 반영이다. 이는 곧 중생이 직면한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또, 인연과 공생이다. “돈이 없어 거지 되었네”라는 후렴 속에는 탐욕과 인연, 사회적 연대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각설이는 단절된 삶이 아닌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중생’으로 자신을 위치시킨다.각설이타령은 어려운 한자어나 경전 대신, 쉬운 민중어를 통해 깨달음의 단초를 제시한다. 이는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대중적 법문’의 이상적인 형태이다.“내가 짓고 내가 받네”라는 구절은 업보(業報)의 관점이며, 각설이의 몸짓은 이미 참회와 나눔의 실천이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자비의 실천이 담긴 대목이다.오늘날 각설이타령은 ‘천박한 유흥’으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안에 깃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연민의 정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문화예술치유, 대안교육, 불교 포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가치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결론적으로 각설이타령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피어난 연꽃이라고 할 수 있다.각설이타령은 고단한 인생의 노래이자, 수행 없는 수행의 길을 보여주는 대중적 깨달음의 장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진리를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범부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되새길 수 있다.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천한 노래 속에도, 가장 낮은 사람의 입에도 불성이 깃들어 있다.각설이는 반드시 돌아온다. 작년에도 왔고 올해도 온다. 죽지도 않는다. 고고한 이 민중의 목소리, 몸짓, 거침없는 민중의 언어로 돌아온다. 이제는 각설이를 재조명할 때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