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역사나 산남의진유사에 그 이름이 없어도 일본군의 재판기록에 근거하여 서훈을 받은 분들이 꽤 많다. 그런데 김도언 의사는 1909년 10월 27일 대구옥에서 재판받은 기록이 있음에도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역사나 유사에도 그 이름이 있고 재판기록까지 있는데 왜 서훈을 받지 못했을까? 이렇게 그 공훈을 인정받지 못한 의사들이 수없이 많으니 할 일도 많다 하겠다.김안동본관은 월성이고 청송에 살았던 사람이다. 성품이 쾌활하고 일을 도모하는 능력이 있었다. 1907년 정미에 청송 지방과 연결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또한 서종락과 더불어 의병진에 함께할 사람들과 선비들을 본진으로 보내주었다. 뒤에 최세한을 따라 각 지역과 연통하여 서로 연결하는 일을 함에 어려움과 험함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 전말(顚末)은 상세하지 않다.〈원문〉 金安東은 月城人이요 靑松居人이라 性이 快活하고 有謀事之能하야 丁未之年에 爲靑松各地連召募하야 與徐鍾洛으로 募集人士하야 歸之本陣하고 後에 從崔世翰하야 各地通謀에 不避艱險이러니 顚末未詳이라 <山南倡義誌 卷下57p>金安東 義士 略歷(김안동 의사 약력)金安東(김안동)은 貫鄕(관향)은 月城(월성)이요 出身地(출신지)는 靑松(청송)이라 連召募(연소모)로 활약하더니 전말은 불상이라  <山南義陣遺史473p>                                                                    심일지청송 사람으로 서종락이 이끄는 의병진의 참모장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도량이 남다르고 재주와 기량이 출중하여 진두(陣頭)에서 찬획(贊畫)함에 백번을 계획하여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했다. 대세(大勢)가 날로 그릇되고 도모하고 추구하던 일이 와해될 지경에 이르자 관동으로 숨어들었다.〈원문〉沈日之는 靑松人이라 靑松徐鍾洛陣之參謀將也라 或言度量이 過人하고 才器出衆하야 陣頭贊畫에 百無一失이런니 大勢日非하야 事至瓦解하니 遂避身於關東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7p>沈一之 義士 略歷(심일지 의사 약력)沈一之(심일지)는 청송고을에 世居(세거)하였다 戊申年(무신년)에 산남의진이 각지에 유격전으로 분파될 때 靑松陣參謀長(청송진참모장)으로 있었다 性稟(성품)이 과감하고 인격이 민첩하여 진두에서 찬획하여 百無一失(백무일실)이 되도록 하더니 國土(국토) 전체가 왜적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하는 수 없어 드디어 關東(관동)지방에 들어가서 피신하다  <山南義陣遺史496p>김도언벼슬은 사과(司果)1)이며 호는 박천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박천고을의 군수였다고 하는데, 최세한 대장 때 산남의진에 들어와 도총장이 되었다. 눈빛이 마치 번개와 같고 위엄과 거동이 예사롭지 않아 자못 무사(武士)의 기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큰일이 실패한 뒤 적에게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전말(顚末)은 상세하지 않다.  <山南倡義誌 卷下57~58p> 〈원문〉金道彦은 官司果요 號博川이라 或言博川郡守하다 崔大將時에 入陣爲都摠將하다 眼光이 如電하고 威儀過人하야 頗有武士之氣像이러라 大事敗後에 被執하야 死於大邱獄云하니 顚末未詳이라金道彦 義士 略歷(김도언 의사 약력)金道彦(김도언)은 官(관)늠 司果(사과)요 博川郡守(박천군수)라 入陣(입진)하여 처음에 大邱(대구)玄風(현풍) 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고 都總將(도총장)으로 활약하였고 후에 피금되어 大邱(대구)에서 옥사하였다  <山南義陣遺史4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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