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1893년, 약 120년 전 영천 신녕에서 설행된 ‘만인계’· 우리나라 복권문화의 원형으로 추정· 영천 신녕 만인계 다량으로 발견·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1879~1910)도 경남 마산포의 만인계 채표회사(彩票會社) 사장 조선 1893년 영천 신녕에서 발행한 만인계표(萬人契票)가 63장이 발견되었다. 만인계란 민간협동체의 계원(契員) 10000명 정도를 모아 일정액의 곗돈을 걸고 등수를 매겨 심지 뽑기와 같은 추첨이나 알을 넣은 통을 흔들어 수를 뽑아서 추첨하여 상금을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초창기에는 남은 돈으로 학교나 다리를 놓거나 보수하는 등 공공자산으로 활용하던 현재의 복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우리나라 복권문화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이번에 발견된 만인계 계표는 1893(계사)년 10월에 추첨하는 달로 정해 두냥(2兩)의 계금을 받았다. 크기는 14.5×11.6cm로 붉은색 먹을 사용하여 목판으로 인쇄되어있다. 판매번호는 제6598호에서 제7285호 사이에 있는 번호들로 손으로 써서 기록한 숫자가 있다. 종이의 가장자리에는 종이를 뚫어서 대량으로 묶어둔 것으로 보이는 구멍인 비침(구멍)이 있다.판매가인 계금 두냥(2兩)의 가치는 얼마일까? 당시 한성(서울)의 소매 쌀값으로 상등품 1되는 1894년 7전 4푼으로 도매 쌀값 1석은 11냥 3전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으로 2냥은 쌀 2말 정도의 가격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의 시세와 비교하기 어렵지만 서민들 기준에서는 큰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만인계표의 흔적은 서지(書誌)관련 경매사나 옥션에서 낱장의 형태로 가끔 발견되었다. 이번에 영천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경우는 처음이다. 현재에 발견된 만인계표는 마산항과 전주군 · 대구 풍각 · 영천 신녕에서 발행된 자료가 현존하는 것으로 보인다,각 지역에서 간행한 계표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윤대원의 <한말 만인계(萬人契)의 내부구조와 실상>(2008) 소논문에 의하면 경북지방의 만인계를 행한 지역을 살펴보면 경북 봉화(1893년) · 영덕(1901년) · 창녕(1900년)으로 조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대구 풍각(1893년) · 영천 신녕(1893년) 2곳을 추가해서 살펴본다면 경북지역에 만인계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1893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만인계의 시초는 중앙정부에서 부과한 조선왕실이 사용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계획되었던 것으로 윤대원의 논문에서는 밝히고 있다. 또 1894년 2월 조선왕실에서는 부산항의 호상보험회사에게 만인계를 인허하면서 중앙정부에 상납해야 할 공납을 군수나 이서배가 착복하여 상납액에 결손을 발생한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최소 지역의 군수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01년에 부산항 만인계의 추첨결과로 살펴본 내용에서 감옥 수리비 · 부산면 도로교량비 등에 소비하여 공익적인 곳에 사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눈에 띄는 만인계 활동으로는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경남 마산포의 만인계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채표회사(彩票會社) 사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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