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곤란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거의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대부분의 경우 곤란한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게 되고 그 화는 결국 내 몸의 질병의 원인이 된다. 종교는 이러할 때 필요하다. 곤란함이 내게 오지 않도록 비는 것은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다. 내게 곤란함이 닥쳤을 때 그 곤란함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길인 것이다. 보왕삼매론의 두 번 째 구절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남복수자는 경도 본관은 영양이며 운강공의 후손이다.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종사한 날로부터 과감하고 충성스럽고 곧음으로 자못 명성과 칭송이 있었다. 그러나 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적을 섬멸하지도 못했는데 내가 먼저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가슴 아프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원문〉南福洙는 字景都요 英陽人이라 雲崗之后라 從事之日에 以果敢忠直으로 頗有名稱이러니 因病而歸하야 嘆曰敵不殲滅하고 身死하니 是痛矣라 하고 遂死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8~59p>南福洙 義士 略歷(남복수 의사 약력)南福洙(남복수)는 字(자)는 景都(경도)이오 관향은 英陽(영양)이라 入陣(입진)하여 과감충용으로 칭찬이 있더니 病(병)으로 귀가하여 逝去(서거)하다  <山南義陣遺史475p>남복수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1880년 5월 9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월매리(月梅里)에서 아버지 남붕석(南朋錫)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자는 경도(景都)이다. 이명으로 남수복(南洙卜)을 쓰기도 하였다. 1906년 3월 산남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산남 의병부대는 을사늑약 이후 동엄(東嚴)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은 그의 아들 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가 향리 경북 영천(永川)에서 주변 각 군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부대이다. 청송 지역에서 영양 남씨 일족인 남석우(南錫佑)·남석인(南錫仁)·남석하(南錫夏)·남석구(南錫球)·남석술(南錫述)·남석우(南錫祐) 등 17명과 함께 산남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산남 의병부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군자금의 징수와 무기 수집 등에 종사하는 한편, 1907년 9월 1일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이한구(李漢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한 입암전투(立巖戰鬪) 등에도 참여하였다. 그 뒤 대장 정환직의 휘하에서 입암(立巖)·동대산(東臺山)·화장(花壯)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부상을 입고 귀향하였다. 1931년 1월 2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박용운벼슬은 참봉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거사(擧事)를 일으키던 초기 구한서, 안수원 등과 더불어 마음을 함께하며 힘을 다하여 사냥꾼들을 모집하였다. 일이 실패한 뒤 자연에다 몸을 감추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원문〉朴龍雲은 官參奉이요 密陽人이라 起事之初에 與具漢書安守元으로 同心戮力하야 召募獵手하다 事敗後에 隱身於巖穴之間하야 廢身不出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9p>朴龍雲 義士 略歷(박용운 의사 약력)朴龍雲(박용운)은 官(관)은 參奉(참봉)이요 관향은 密陽(밀양)이라 山下(산하)에 포수들을 모집하여 入陣(입진)시키고 처음에 淸道(청도) 昌寧(창녕)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고 진두에서 활약하더니 후에 은신하다  <山南義陣遺史475p>최익문자는 주서이고 본관은 월성이다. 산남의진에 들어올 때 개인적인 재물로 소 두 마리를 들여 많은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고 서종락을 따라 청송에서 재차 의거(義擧)할 때는 전 재산을 털어 의병진의 뒤를 지원하였다. 일이 실패하자 몸을 감추었다.〈원문〉崔益文은 字周瑞요 月城人이라 入陣之時에 以私財로 納二牛하야 犒大軍하고 從徐鍾洛復擧於靑松하야 傾全家産以輔陣後하고 至事敗而隱身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9p>崔益文 義士 略歷(최익문 의사 약력)崔益文(최익문)은 字(자)는 周瑞(주서)이오 貫鄕(관향)은 月城(월성)이오 竹長出身(죽장출신)이라 山南義陣(산남의진)이 靑松(청송)을 통과할 때에 農牛(농우) 二頭(이두)로서 호군하였으며 후에 靑松郡東部陣(청송군동부진)을 원조하다가 전 재산을 탕진시키고 의진이 전말되매 은신하다  <山南義陣遺史4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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