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보왕삼매론의 세 번째 구절이다.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혀 출세나 밥벌이의 수단으로 쓰는 것만 공부로 아는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구절이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통하여 한 평생을 대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금과옥조의 말씀이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에 화내고 짜증내고 목숨 걸어봐야 무슨 소용이랴. 마음 안으로 즐겁고 고요한 공부가 으뜸이리라.최치환본관은 전주이다. 산남의진의 거사(擧事)를 처음 시작할 때 맨 먼저 산남의진에 들어와 종사하면서 각 지역의 통모(通謀)와 군기(軍器) 모집에 자못 민첩하고 빠름이 있어 아래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뒤에 적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힌 지 몇 년 만에 출옥하여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갔다. 급기야 적들이 만주에 들어오자 또 적을 피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원문〉崔致煥은 全州人이라 起事之初에 首先從之하야 各地通謀와 軍器募集에 頗有敏速하야 得上下之稱이런니 後被執於敵하야 繫獄數年而出하야 率妻子渡滿洲라가 及敵之侵入滿洲에 又避歸鄕里하야 未幾而卒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9p>崔致煥 義士 略歷(최치환 의사 약력)崔致煥(최치환)은 貫鄕(관향)은 全州(전주)요 出身地(출신지)는 現(현) 迎日郡(영일군) 竹長面(죽장면) 芝洞里(지동리)라 성품이 豪俠(호협)하고 기운이 건장하였으며 총쏘기를 잘하는 포수로서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처음 시작할 때 남 먼저 들어와서 각 지방에 연락을 하여서 인원징벌과 물자모집에 큰 공로를 이루었다 丙午年(병오년)으로부터 庚戌年(경술년)까지 五年(오년)을 계속하여 위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풍찬노숙을 하면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왜적들에게 被擒(피금)되어 七年(7년) 獄苦(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滿洲(만주)로 이거하였더니 왜적들이 또 만주로 침략하는지라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비밀운동을 하다가 많은 恨(한)을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났다 <山南義陣遺史467p>최치환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최치환은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은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 손내숙(孫迺叔) 등과 힘을 합쳐 각지에 통유문(通諭文)과 권고문을 발송하는 한편, 지방관에게는 통고문을, 각 진(鎭)에는 격문을 보내 거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민중에게 호소하는 청조문(請助文), 농민을 안도시키는 고시문, 유림을 격려하는 격고문 등을 내어 거의를 준비하였다. 이윽고 정용기 의병장은 포수와 농민 등의 민병을 규합하여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최치환은 군사 초모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각 지역을 연락하고 군기(軍器)를 수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적의 모략에 속아 정용기 의병장이 붙잡히는 바람에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출옥한 정용기 의병장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07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사들을 모아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하였다. 최치환은 이때에도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후 산남의진은 해산군인을 포섭하여 병력을 보강하고 군령을 정하여 장병들을 단속하는 등 군세를 확장하고 같은 해 8월부터는 청하읍을 습격하고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년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의 장령들이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최치환은 이때 체포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