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 네 번째 구절이다.『수행하는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사전은 ‘수행(修行, 산스크리 트어: 사다나)은 자아를 초월하는 영적 행위이다. 다양한 정신적 또는 의식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따르는 힌두교, 불교 및 자이나교 전통의 다양한 학문을 포함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는 몸과 마음을 닦는 다양한 행위를 모두 수행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어쨌든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면 이제까지의 습관들이 막아선다. 굳어버린 습관을 까르마 또는 업식(業識)이라 하는데, 그 업의 힘에 의한 온갖 유혹들이 곧 마(魔)이니 어찌 마가 없을 수 있으랴. 몸에 병이 오면 병을 다스리고 고쳐가며 살 듯, 마도 또한 내치려고만 하지말고 벗으로 삼아볼 일이다.우영조자는 성장이고 본관이 단양으로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판서로 추증된 배선의 11세손이다. 1907년 정미에 화약 등을 손영각을 통하여 산남의진에 들여보냈다. 급기야 서종락이 의거를 일으킬 때 중군장의 임무로 각 지역에 출몰함으로써 온갖 어려움을 이어갔으나 끝내 일이 이롭지 않고 자신마저 적에게 사로잡혀 청송에서 여러 고을을 거쳐 대구에 이르렀다. 감옥에 갇힌 지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물고기 잡고 나무하는 것으로 끝내 늙었다.〈 원 문 〉 禹永祚는 字聖章이요 丹陽人이라 壬辰倡義贈判書拜善之十一世孫也라 丁未之年에 火藥等屬을 因孫永珏而納本陣하고 及徐鍾洛之擧에 以軍中之任으로 出沒各地하야 以續萬難이러니 事竟不利하고 遂被執하야 自靑松으로 歷列邑而至大邱하야 繫獄數年而歸하야 以漁樵로 終老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9p>禹昌吉 義士 略歷(우창길 의사 약력)禹昌吉(우창길)은 字(자) 聖章(성장)이며 號(호) 訪雲(방운)이라 山南義陣(산남의진)에 從軍(종군)할 때에는 이름을 永祚(영조)라 하였다 貫鄕(관향)은 丹陽(단양)이오 高麗(고려) 鄕貢進士戶曹正郞(향공진사호조정랑) 諱(휘) 玄(현)의 遠世孫(원세손)이라 그의 世德(세덕)은 忠孝(충효)로서 根本(근본)을 傳(전)하였다 檀紀(단기) 四二○三(4203), 西紀(서기) 一八○七(1807) 高宗(고종) 庚午(경오) 七月十五日(7월15일)에 慶州府(경주부) 竹長縣(죽장현) 五舍里(오사리)에서 父(부) 諱(휘)는 熙二(희이) 母(모)는 金寧金氏(김녕김씨)의 맏아들로서 出生(출생)되었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너그럽고 기운이 장하여 항상 수렵을 좋아하더니 二十(이십) 미만에 명사수로 저명하였다 公(공)의 時年(시년) 二十五(이십오)에 靑松府(청송부) 縣東(현동) 訥仁(눌인)에 移居(이거)하니 그때는 벌써 국운이 비색되어 국가에서는 甲午動亂(갑오동란) 乙未弑變(을미시변) 丙申倡義(병신창의) 모든 경난을 겪어오고 민간에서는 甲午年(갑오년)의 큰 흉년과 민난리 乙未年(을미년)의 국모 피시에 대한 민심격분 丙申年(병신년)의 국모원한을 설치코자 하는 義兵(의병) 운동 모든 파란이 갈수록 격심하게 되어서 倭(왜)놈들의 손아귀에 들어있는 우리 정부는 도리어 의병을 탄압하니 민심은 더욱 더 분격되어 곳곳에 일어나는 소요가 玉石(옥석)을 분간 못하게 되는지라 公(공)은 救國安民(구국안민)에 큰 뜻을 품고 처음에 義興緝捕陣(의흥집포진)에 투신하였다가 다시 靑松約 陣(청송약포진)에 종사하였으나 모두 내 마음에 적합한 효과를 못 이루고 울분한 심정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더니 설상가상으로 소위 乙巳(을사)조약이란 민족사상에 막대한 모욕을 당하니 국가상하에 비분이 극도에 달하여 애국지사들은 생명을 받치어 국권을 회복코자 할 그 무렵이라 이때 군내에 좋은 소식이 들어오니 그 내용인즉 都察使(도찰사) 東广先生(동엄선생) 鄭煥直(정환직)이 光武皇帝(광무황제)의 密詔(밀조)를 받고 그의 아들 丹吾公(단오공) 鏞基(용기)를 영남에 보내서 義兵(의병)을 일으켜서 왜놈들을 격퇴코자 하는 운동인데 그 단체이름은 山南義陣(산남의진)이라 公(공)은 이 소문을 듣고 남 먼저 일어나서 郡內(군내) 同志(동지)들의 손을 잡고 군내 전역을 방문하여 義士(의사)를 모집하여 산남의진에 보내고 武器(무기)를 수집하여 반출시키니 산남의진으로부터 公(공)을 靑松地方連召募將(청송지방연소모장)이란 指命(지명)으로서 지방에 머물러서 활동하라는 촉탁이 있기로 公(공)은 불피풍우하고 근로를 전개하였기에 丙午(병오)丁未(정미) 양년간 산남의진이 도처에 적을 무찌르고 싸울 때 후방물자 보급이 당분간 청송에 있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