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시민들이 풍수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2016년 1월부터 2020년 말까지 약 5년간에 걸쳐 “재미있는 풍수이야기”를 연재 하였는바 독자들의 재요청에 의하여 또다시 풍수지리 전문가 양삼열(楊三烈)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올바로 정립된 풍수학문의 전달과 풍수인식에 대한 잘못된 사고 등 풍수전반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함으로서 애독자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가면 다산 정약용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생가가 있다. 이곳은 다산의 명성에 걸맞게 경기도 기념물 제 7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정약용(1762~1836)은 2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19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다가 40세에 유배를 시작해서 17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과거 급제 후 정조의 총애 하에 암행어사와 형조참의 등을 거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성리학과 배척관계에 있는 천주교 입교사실이 알려져 1801년부터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진주목사였고 형님들도 벼슬을 했지만 당시 서학과 천주교를 접하게 되면 조선의 국교인 유교를 반하게 되고 노론으로부터 미움을 싸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고 만다. 40세에 시작한 유배생활은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로 유배 중에도 학자로써 재능을 발휘해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다산은 유배를 떠나면서도 백성들의 배고픔을 외면하는 썩은 관리들을 질타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유배생활과 마지막 고향에서의 유유자적한 세월이 없었다면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여유당전서』와 같이 주옥같은 그의 저술과 기타 500여권의 저서는 만나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강진 유배지에서는 일정한 거처를 정하지 못하여 8년을 보냈으나 외가인 해남윤씨 가문의 배려로 다산초당을 얻은 후 생활이 안정되어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1818년 8월 유배지에서 풀려나 마지막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저술에만 힘쓰다 1836년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다산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는 풍수적으로 보아 양택삼요결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전저후고前低後高, 전착후관前窄後寬의 조건을 모두 갖춘 정남향의 집이다. 옛부터 남향집을 얻으려면 3대가 적선을 해야 한다고 하였는바 자연의 조건이 남향의 이치에 맞는 양택지가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집의 가상은 대문이 동쪽에 위치한 동사택이고 안방과 부엌 또한 같은 방위라 동서사택이론으로도 합법하다. 그런데 다산은 음택풍수의 발복론에 대해서는 ‘풍수집의(風水集議)를 통해’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본인이 죽기직전에도 두 아들을 앞에 두고 내가 죽으면 지관을 부르지 말고 집 뒤뜰에 그냥 묻어 장사지내라고 유언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집 뒤쪽에 모셔진 다산의 묘소는 한북정맥의 줄기인 예봉산(683m)에서 뻗어 내려온 산맥이 묘소 뒤쪽의 현무봉(217m)을 일으키고 여기서 남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은 용맥에 생기가 응집된 장소다. 이곳에 부인 홍씨와 함께 합폄하여 자좌오향으로 모셔져 있고 그 용맥의 마지막 부분에 본인이 태어나서 자란 생가가 들어서 있다. 이곳은 좌우로 청룡백호가 감싸주고 앞으로는 두 줄기의 한강물이 만나 환포하며 흐르고 그 넘어 조⋅안산이 마주 한다. 한강물은 좌에서 우로 감싸주는데 청룡은 짧고 백호는 길게 역관을 해주며 그 밖의 외 백호까지도 환포해주니 생가와 묘 터 둘 다 풍수적 길지에 자리 잡고 있다.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4-07-20 19:17:12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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